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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서울 4대문 4소문
    생활 속 이야기(일반) 2009. 2. 9. 23:59

    서울의 4대문과 4소문

     

     


    흥인지문(興仁之門) 방위는 동쪽 의미는 어질고 착함을 뜻합니다.


    돈의문(敦義門)                 서             의로움


    숭례문(崇禮門)                 남              공손하고 예의 바름


    소지문(昭智門)                 북               지혜로움을

     

    보신각(普信閣)                 중앙            믿음


    이렇게 유교의 인의예지신(五德)을 상징적으로 반영한 것입니다
     


    동대문(東大門)은 흥인지문(興仁之門)으로 오행 중 목(木)에 해당되는 인(仁)을 표시하였다. 목은 동쪽이므로

    풍수지리 적으로 약한 동쪽을 보완 해주기 위해 흥인(興仁)이라 하고 지(之)자를 더 넣었다. 또 옹성을 쌓아 허함을 보강하였다.

    서대문(西大門)은 돈의문(敦義門)으로 오행 중 금(金)에 해당되는 의(義)를 표시하였다.

    서쪽에는 중국과 통하므로 중국과 의리를 더욱 돈독히 한다는 의미다.

    남대문(南大門)은 숭례문(崇禮門)이며 오행 중 화(火)에 해당되는 예(禮)를 표시하였다. 남쪽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불로서 다스린다는 의미고,

    불이 잘 타오르도록 세로로 현판을 하였다.

    북대문(北大門)은 숙정문(肅靖門)이며 숙청문(肅淸門)이라고도 하였다. 이 문은 사람의 출입을 위하여 사용한 적은 거의 없이 수 백년 동안 닫혀 있었다. 이 문을 열어놓으면 북쪽은 수기(水氣) 즉 음기(陰氣) 많아 장안의 부녀자들이 풍기가 문란해지고 놀아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름도 엄숙히 음기를 다스린다는 의미로 지었다.

    그러나 실제는 이 문이 경복궁의 주산인 북악산과 종묘의 주산인 응봉으로 통하기 때문에 지맥이 상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 문을 닫아 놓았다.

    동소문(東小門)은 혜화문(惠化門)이며 북대문과 동대문의 중간 즉 간방(艮方)에 위치한다. 혜화(혜화)란 은혜를 베풀어

    교화한다는 뜻인데 여진족의 사신이 출입하던 곳이기 때문에 그들을 교화한다는 의미에서 이름한 것이다. 여진족 사신의

    숙소인 북평관(北平館)이 그 근처에 있었다. 처음에는 홍화문(弘化門)이라고 하였다가 창경궁의 정문 이름이 홍화문이어서

    혼동을 피하기 위해 바꾸었다. 그런데 이 문루 바닥에는 용이 아닌 봉황이 그려져 있는데 이것은 그 일대에 새떼가 많아서

    새의 피해를 막기 위해 새 중의 왕인 봉황을 그렸다고 한다.

    서소문(西小門)은 소덕문(昭德門)이라 하였다가 성종 때 부왕인 예종 왕비의 시호를 휘인소덕(徽仁昭德)이라 하면서

    중복을 피하기 위해 소의문(昭義門)으로 바꾸었다. 소의(昭義)란 옮은 것을 밝힌다 또는 덕과 의를 숭상한다라는 뜻이다.

    남대문과 서대문 사이 곤방(坤方)에 위치하고 있으며 의주로 넘어가는 길이다. 조선조 때 도성에서 사람이 죽으면 반드시

    두 문으로만 관이나 상여가 나가게 되어 있는데 남소문인 광희문과 서소문인 소의문이었다.

    북소문(北小門)은 창의문(彰義門)이며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하였고 북문(北門)이라고도 불렀다. 북대문은 항상 닫혀

    있었고 대신 이 문을 열어놓았기 때문에 북문이라고 불렸던 것이다.

    서대문과 북대문 사이 건방(乾方)에 위치하고 있다.

    이 문 위에는 나무에 새긴 닭을 걸어두었는데 성문 밖의 지형이 마치 지네와 같으므로 지네의 상극인 닭을 메달아 그 기를

    누르기 위함이다. 창의(彰義)란 의를 기리고 표창한다는 뜻이다.

    남소문(南小門)은 광희문(光熙門)이며 속칭 수구문(水口門), 시구문(屍口門)이라고 불렀다.

    남대문과 동대문 사이 손방(巽方)에 위치하며 도성의 청계천 물이 이곳으로 빠져나가므로 수구문이라 하였고, 서소문과 함께 사람이 죽으면

    시신이 나가는 문이므로 시구문이라 불렀다. 광희(光熙)란 광명을 뜻하지만 조선왕조 마지막 연호인 광무(光武)와 융희(隆熙) 앞 뒤 글자를 합한 것과 같아 이것이 시체처럼 밖으로 나가기 때문에 조선왕조 종말을 뜻한다고 풀이하기도 한다.

    <한양 도성의 4대문과 4소문의 위치

     

    조선의 태조 이성계가 도읍을 정한 한양에는 4개의 대문과 4개의 소문(小門)이 있었다.

    4개의 대문은 유교의 오상(五常)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에 의해, 동쪽에 흥인지문(興仁之門), 서쪽에 돈의문(敦義門), 남쪽에 숭례문(崇禮門), 북쪽에 숙정문(肅靖門)을 두었다.
    그리고 중앙에 해당되는 곳에 보신각(普信閣)을 두어 도읍의 기본을 갖췄다.

      

     

     

     

    ▲ 흥인지문

    흥인지문(興仁之門)은 한양 도성의 동대문이다.
    인(仁)은 동쪽에 해당되므로 문의 이름에 '인(仁)'이 붙었다.

    다른 문의 이름들과는 다르게 이름이 네 자인 것은 동쪽의 산인 타락산이 산의 지세가 약해 산의 기운을 돋우기 위해 '지(之)'자를 더했다고 한다. (옛 한양을 안쪽에서 둘러싼 4개의 산을 內四山이라고 부른다. 동 : 타락산, 서 : 인왕산, 남 : 목멱산, 북 : 북악산이다.)

     

     

     

     

    ▲ 돈의문

     

    돈의문(敦義門)은 한양 도성의 서대문이다.
    '의(義)'는 서쪽에 해당되므로 문의 이름에 '의(義)' 자가 붙었다.
    한양 도성의 4대문들 중 가장 많은 수난사를 가진 문이다. 처음에는 돈의문이라고 이름지었는데, 태종 13년(1413)에 풍수설을 받아들여 돈의문을 폐쇄하고 새로 문을 내고 이름을 서전문(西箭門)이라고 불렀다. 경희궁의 서쪽에 있었다고 한다.
    그 뒤 세종 4년(1422) 도성을 새로 고칠 때 서전문을 헐어 버리고 지금의 서대문 마루턱에 새 문을 세웠는데 이름을 다시 돈의문으로 부르게 되었다.

    세종 이후 돈의문이 새로 지은 문이라고 하여 새문, 혹은 신문(新門) 부르게 되었고, 지금의 '신문로'라는 지명도 여기에서 유래된 것이다. 1915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철거되어 지금은 찾아볼 수 없다.
      

     

     

    ▲ 숭례문

    숭례문(崇禮門)은 한양 도성의 남대문이며 정문이다.
    '예(禮)'는 남쪽에 해당되므로 문의 이름에 '예(禮)' 자가 붙었다.
    2008년 2월 10일 화재로 소실되기 전까지 남아있었던 우리나라 성문 건물로서는 가장 규모가 크다.
    숭례문의 현판은 태종의 큰아들 양녕대군의 글씨로도 유명하다. 물론 세종의 셋째아들이자 조선의 명필로 이름을 떨쳤던 안평대군의 글씨라는 주장도 있다. 숭례문의 현판은 다른 대문들과는 달리 세로로 서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렇게 만든 이유에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온다.
    숭례문의 이름에 들어있는 '예(禮)'는 오행 중에서 '화(火)'에 해당되는데, 서울의 남쪽 관악산(서울의 외사산(外四山) 중 남산에 해당된다.)의 모습이 불꽃 모양이 아닌가? 거기에 가까이 있는 목멱산(남산의 옛 이름)에는 불에 잘 타는 나무(木)이 들어 있으니... 이에 관악산의 화기(火氣)를 막기 위해서 글씨를 세로로 길게 늘어뜨려 성문 밑을 막고 누르면 화기가 들어오지 못할 것이란 믿음 때문이었다고 한다.

    임진왜란 때 이 현판을 잃어버린 일도 있었는데, 몇 년 뒤인 광해군시대 어느 날 밤, 지금의 서울 청파동 한 도랑에서 서광이 비치기에 파보았더니 숭례문 현판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전한다.
    석축의 양측에는 원래 성벽이 연결되어 있었으나, 1908년 일본의 황태자가 조선을 방문할 때, 성문의 아래쪽을 지나치기 싫다고 하여, 길을 내기 위하여 헐어내 없어졌다.
     

    ▲ 숙정문

    숙정문(肅靖門)은 한양 도성의 북대문이다.
    본래 북쪽에 해당되는 것은 '지(智)'인데, '꾀정(靖)'자를 사용하는 변화를 시도하였다.
    숙정문은 숙청문(肅淸門)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숙정문도 많은 사연을 가진 문이었다. 태조 4년(1395)에 처음 건립되었으나, 태종 13년(1413)에 최양선이 주장한 '백악산 동령과 서령은 경복궁의 양팔에 해당하므로 여기에 문을 내어서는 안되다'는 의견에 따라 창의문(자하문)과 함께 폐쇄하고 길에 소나무를 심어 사람들의 통행을 금하였다고 한다.

    원래 이 문은 높은 산 중턱에 있어 길이 매우 험하며 문을 나서면 북한산이 앞을 가로막아 동쪽으로 성북동 골짜기로 내려와 동소문(혜화문) 밖 경원가도로 나오는 길 이외에는 다른 길이 없어 서울에 들어오는 데에는 동소문(혜화문)을 거치는 것이 더욱 빠르고 편리하므로 이용하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그러므로 이 문을 폐쇄하여도 아무런 지장이 없어서 영구히 닫아두었다.
    다만 가뭄이 심할 때에 이 문을 열고 숭례문을 닫는 풍속이 있었다. 이것은 북은 음이고 남은 양인 까닭에 가뭄 때 양을 억제하고 음을 돋우는 음양오행사상에서 나온 것이다.

    또한 숙정문을 열어놓으면 장안의 여자가 음란해지므로 항상 문을 닫았다는 속설도 전하는데, 그것은 숙청문이 여자의 방위인 북쪽에 있기 때문이다.(북쪽은 음의 기운이 강한 곳이다.)
    숙정문을 대신하여 창의문을 북문이라고 부르기도 했다고 한다.
    1976년 대통령의 명으로 북악산 일대의 성곽을 복원할 때 함께 복원되었다.

     

    ▲ 홍지문

    홍지문(弘智門)을 북대문으로 말하기도 하는데, 홍지문은 숙정문보다 후인 1715년 숙종 41년에 서울의 도성과 북한산성의 방어시설을 보완하기 위해 홍지문과 오간수문, 탕춘대성을 건립하였다. 홍지문은 서울의 북서쪽 방어를 위한 탕춘대성의 출입문으로 한북문이라고도 하며, 홍지문에 연결된 탕춘대성은 서쪽에 있어서 서성이라고도 한다.

     

     

     

    ▲ 보신각

    보신각(普信閣)은 보신각종(普信閣鐘:보물 제2호)을 걸기위해 만든 것으로 정면 5칸, 측면 4칸이다.  조선시대에 한양에 종을 처음 건 것은 태조 7년(1398)이다. 광주에서 종을 주조하여 청운교(靑雲橋) 서쪽에 걸었는데, 태종 때 종루가 통운교(通雲橋) 북쪽(현재의 종로 네거리)으로 옮겨졌다. 세조 즉위 초에는 다시 큰 종을 주조하여 달았다.

    이 종은 임지왜란으로 파손되고, 그 후 광해군 11년(1619)에 현재의 보신각 자리에 종각을 다시 짓고 원각사종(圓覺寺鐘)을 옮겨 걸었다. 그리고 인정(寅正:오전 4시)에 33번, 오후 7시에 28번 타종하여 도성의 문을 여닫고 시각을 알렸다.
    현재의 종각은 서울시가 1979년 8월에 세운 동서 5칸, 남북 5칸의 중층 누각이다.

     

    원각사종은 본래 세조 14년(1468)에 주조한 것인데, 원각사가 폐사된 후 1536년(중종 31)에 남대문 안에 옮겼다가 1597년(선조 30) 다시 명례동(明禮洞) 언덕으로 옮겼던 것을 가져온 것이다.
    이 종각은 수차에 걸쳐 화재와 중수를 거치다가 고종 32년(1895) 보신각이라는 사액(賜額)을 내려 이후 종도 보신각종이라 불리게 되었다.

    그러나 이 종은 오랜 병화와 재화로 몸통에 균열이 생겨 더 이상 타종할 수 없게 되어 경복궁 안에 새 종각을 짓고 보관 중이다. 지금 보신각에 걸려 있는 종은 대한민국 건국 후 국민의 성금으로 주조된 것이다. 이 종은 1985년 8월 14일 보신각에 걸리고, 다음 날인 광복절에 처음 타종되었다.

     

     

     

    ▲ 혜화문

     

    4대문의 사이에 4개의 소문을 두었는데, 북문과 동문 사이에 혜화문(惠化門-東小門), 동문과 남문 사이에 광희문(光熙門-水口門)을, 남문과 서문 사이에 소의문(昭義門-西小門), 서문과 북문 사이에 창의문(彰義門)을 세웠다.

     

     

    혜화문(惠化門)은 한양 도성의 동소문이다.
    본래의 이름은 홍화문(弘化門)이었다고 하는데, 창경궁이 세워지면서 동문의 이름을 홍화문(弘化門)이라고 짓는 바람에 중종 6년(1511)에 혜화문으로 이름이 바뀌게 되었다고 한다.
    북대문인 숙정문이 항상 닫혀 있다보니 동소문인 혜화문이 북대문의 역할까지 맡아했으므로 많은 사람들이 통행하던 문이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인 1928년에 도시 계획이라는 명목 아래 헐려 없어진 것을 1970년대 후반, 서울 도성 복원 사업 때 다시 복원되었다.

     

     

     


     

    ▲ 광희문

    광희문(光熙門)은 한양 도성의 남소문이다.
    수구문(水口門)이라고도 불렀으며, 도성에서 죽은 사람들의 운구 행렬이 이 문을 통해 성 밖으로 나갔다고 해서 시구문(屍柩門)이라고도 불렀다.
    1915년에 자연 붕괴도어 아래 부분의 석물 부분만 남아있었는데, 1970년대 후반 현재의 모습으로 복원되었다.

     

     

     

    ▲ 소의문

    소의문(昭義門)은 한양 도성의 서소문이다. 소덕문(昭德門)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지금의 서소문동 큰 길에 있었던 것으로 추측하고 있으며, 광희문(光熙門)과 함께 시신을 성 밖으로 운반하던 통로로 사용되었고, 궁궐에서 죄를 지은 사람들이 이 문을 통해 도성 밖으로 쫓겨났다고 한다.
    1914년 일제의 도시계획에 의해 부근의 성곽과 함께 완전히 철거되었고, 지금은 사진을 통해서만 그 모습을 대강 알 수 있을 뿐이다.

     

     

     

    ▲ 창의문

    창의문(彰義門)은 한양 도성의 북소문이다.
    고양군, 양주군 방면으로 통하는 문이었으며, '자하문(紫霞門)'이라고도 불렸다고 한다.
    태종 16년(1416)에 이 길을 통행하면 왕조에 불리하다는 풍수지리설에 의해 문을 닫아 두었다가, 중종 원년(1506)에 다시 열었다고 한다.
    인조반정(1623) 때는 세검정에서 모의했던 반정군들이 이 문을 부수고 궁안으로 들어가 광해군을 몰아내고 인조를 왕위에 앉혔다고 전한다.
    창의문의 서쪽 벽에는 인조반정 때 공을 세운 공신들의 이름을 새긴 현판이 걸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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