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성양산.. 신농씨
    좋은 시, 좋은 글 2010. 9. 8. 16:45

     

    성양산이란 곳에서

    과거에 신농씨가 자편이라는 신비한 채찍을 사용하여

    각종 풀들을 채찍질 했다고 한다.

    그리하면, 약초에 독성이나 약효가 더욱 강해졌다고 한다.

     

    염제 신농씨는 성씨가 강(姜)이고 열산씨(烈山氏, 일설에는 여산씨)라 불렀다. 전설에 의하면 140년간 재위하였다. 일찍이 그는 각종 풀에 있는 약의 효능을 알아보기 위하여 온갖 풀들을 다 먹어보았는데, 극독이 있는 단장초(斷腸草)를 맛보다가 중독되어 그만 죽고 말았다. 그가 죽은 후 시신은 차릉(茶陵: 지금의 호남성 차릉현)에 묻혔다고 한다.

    염제 신농씨는 상고시대 부락의 장으로 강수(姜水: 즉 기수<岐水>, 지금의 섬서성 봉상현<鳳桑縣> 북쪽 기산<岐山>에서 발원하여 동남쪽으로 흘러 강씨성<姜氏城>을 지남)에서 태어났기 때문에 성을 '강'이라 하였다고 한다. 처음에는 진(陳)에서 살다가 뒤에는 동으로 뻗어나가 곡부(曲阜: 지금의 산동성 곡부현 동북)에서 살았다.


    그의 모습이 소의 머리에 사람의 몸(또는 용의 머리에 사람의 몸)을 하고 있었다고 전해지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가 다스린 부락은 소(또는 용)를 토템으로 하는 민족 있었을 것이다. 그는 나무로써 쟁기와 보습 등의 농기구를 만들어 사람들에게 농사를 가르치고, 또 약을 발명하여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였기 때문에 의약과 농업의 창시자로 추존된다.

    염제 신농상(미국화강박물관)

    전설에 의하면 염제는 황제(黃帝)와 이복형제로 소전씨(少典氏) 족장의 아들이었다고 한다. 염제의 어머니는 유와씨(有?氏)로 이름이 여등(女登)인데, 신룡(神龍)을 보고 감응을 받아 임신을 한 후에 염제를 낳았다고 한다.


    그는 동으로 나아가 판천(阪泉: 지금의 하북성 탁록현 동남)에서 황제(黃帝)와 충돌하여 일전을 벌였으나 패하였다. 뒤에는 다시 황제와 연합하여 치우(
    蚩尤)를 물리친 후에 부락을 이끌고 황하 유역에서 오랫동안 번영을 누렸다. 염제 신농씨와 황제가 맺은 부락연맹은 화하족(華夏族)의 주요한 성분을 구성하였다. 화하족은 뒤에 다시 한족(漢族)으로 발전하였다. 따라서 한족의 후예를 "염황자손(炎黃子孫)"이라 칭하는 것이다.


    전설에 의하면 염제가 태어나기 전에 사람들은 수렵채집 생활을 하고 있었다. 염제는 '뇌사'(
    ??: 쟁기의 일종)라고 하는 농기구를 발명하여 사람들에게 사용법을 가르쳐주었다. 이에 사람들은 농토를 개간하여 오곡을 심고 농사를 지을 수 있게 되었다고 한다.  염제를 신농씨 또는 열산씨라 칭하는 이유는 그가 바로 농업을 발명하였기 때문이다. '신농(神農)'은 말 그대로 '농업의 신'이라는 뜻이고, '열산(列山)'이라는 말도 '산의 초목을 불태워서 농토를 개간한다'는 뜻이다.


    염제는 사람들에게 태양의 운행을 기준으로 삼게 한 다음, 태양이 머리 위 정중앙에 왔을 때 지정된 장소에 모여 상품거래를 하고 일정한 시간이 지나면 해산하게 하였다고 한다. 이것은 바로 지금도 중국이나 우리나라 농촌지역에서 행해지고 있는 시장의 추형이다. 즉 염제는 인간의 경제생활에서 반드시 필요한 시장이라는 형태를 최초를 만들어내기도 하였던 것이다.


    ≪회남자≫「수무편(修務篇)」에 의하면, 염제 신농씨는 '자편(
    ?鞭)'이라는 신기한 회초리를 가지고 여러 가지 약초들을 때려서, 약초에 독성이 있는지 없는지, 효능이 어떠한지, 한성(寒性)인지 열성(熱性)인지를 판별할 수 있었다고 한다. 여기에서 그는 효능이 뛰어난 약초를 골라내어 사람들의 병을 치료하였다고 한다. 지금도 산서성의 성양산(成陽山)에는 신농원(神農原)이라는 작은 산('약초산<藥草山>'이라고도 함)이 있는데, 당시에 염제 신농씨가 회초리로써 약초를 판별하던 장소라고 한다.


    또 다른 전설에 의하면 그는 직접 온갖 풀들을 먹어보고 그것들의 효능을 밝혀내기도 했다. 한번은 그가 70여종의 독초를 맛보고 그 독성을 하나하나 제거하였다고 한다. 특히 어떤 민간전설에는 그가 다시 극독이 있는 단장초를 먹고 중독되어 손도 쓰보지도 못한채 장이 끊어져서 죽고 말았다고 전해지고 있다. 현재 산서성 태원시(太原市)의 신부강(神釜崗)에는 신농이 약초를 맛보던 전설상의 솥(鼎)이 남아있다.


    명대에 주유(周游)의 ≪개벽연석(開
    ?衍釋)≫ 제18회 왕주승(王主承) "석의(釋疑)"에는 당시 사천(四川) 지역에 전해오던 민간전설이 하나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에 의하면, 염제 신농씨는 지네를 먹었는데 그것이 뱃속에서 많은 벌레로 변하여 구제할 길이 없자 결국 산채로 고통속에서 죽어갔다고 한다. 이것도 앞서 말한 전설과 유사한데, 모두 염제 신농씨가 인류를 위해 헌신한 숭고한 정신을 가지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춘추전국시기에 이르러 염제의 후손임을 자칭하는 나라들이 대단히 많이 출현하였다. 그 중 가장 유명한 나라는 바로 '강(姜)'씨 성의 '제(齊)'나라였다. 강태공(姜太公)은 주(周)의
    문왕(文王)무왕(武王)을 보좌하여 상(商)의 주왕(紂王)을 토벌하고 서주(西周) 왕조를 세우는데 최고의 공을 세운 인물이다. 이러한 공적으로 강태공은 제나라를 봉토로 하사받고 제후에 책봉되었던 것이다. 이 외에도 하남의 여(呂), 신(申), 허(許), 산서의 침(沈), 사(?), 욕(?), 황(黃)과 당시 지금의 섬서, 감숙, 청해, 티벳, 사천, 영하 지역에 산재해 있던 저강(?羌) 또는 강융(羌戎)도 염제의 후손이라 전해지고 있다. 주(周) 왕족의 시조 기(?)의 어머니 강원(姜원, 원=女+原)도 강씨이다. 전설에 의하면 염제와 신농은 원래 별개의 인물이었는데, 후에 ≪세본≫에서 처음으로 그 둘을 한 사람이라 하였다.

    <염제신농씨 관련 문헌기록>


    “웅씨에서 갈라져 나간 사람 중에 소전이라는 사람이 있었다, 안부련 환웅 말기에 소전은 명을 받들어 강수에서 병사들을 감독하고 있었는데, 그의 아들 신농은 여러 가지 풀을 혀로 맛보아 약을 만들었다. 그는 뒤에 열산으로 옮겨갔다.”
     - 태백일사-


    “신농은 열산에서 일어났는데, 열산은 열수가 흘러나오는 곳이다. 신농은 소전의 아들이며 소호와 함께 고씨의 방계 지류이다.”
     -태백일사 신시본기-
     


    염제 신농의 능원

     


    염제 신농의 고향 조감

    '좋은 시, 좋은 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성공하려면 말투부터 바꾸어라  (0) 2010.12.08
    이민홍(떠나고 싶어지면 가을이다)  (0) 2010.10.06
    남 여의 차이  (0) 2010.08.07
    ***거지팔자가 정승팔자로 바뀌다***  (0) 2010.06.10
    엘빈 토플러  (0) 2010.05.04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