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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효조, 최동원의 죽음.
    내가 쓰는 이야기 2011. 9. 16. 08:00

    그들의 죽음에 가장 눈길을 끄는 기사가 있어서 스크랩해 보았다.

    장효조 그와는 같은 학교를 다녔기에,,

    고등학교 시절도 우리나라 최고의 스타였지만,,

    김봉연 정현발 등등 한시대를 대표한 타자들이 있던 학교 시절도 정말 대단한 스타였다.
    더구나 김시진, 김용남 까지 함께한 대학시절에야 상대가 없을 것이 뻔했지만,

    이상스레 다른 학교에 가끔씩은 지곤 하였다..

    같은 학년이었던가? 생각은 어렴풋하지만,

    어쨋든 친구같은, 동창 같은 마음이었는데..죽음을 맞이했다.

     

    언젠가 전문대쪽 운동장이 떠들썩 하기에,, 봤더니,, 그당시 고3이었던 최동원이 연습공을 던지고 있었다.

    왜 그가 그날 그곳에서 연습투구를 했는지는 몰라도, 아마도 스카웃 대상이지는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었다.

    그런 그들이, 나라에 충성한다고, 프로에 조금 늦게 들어간 장효조는 첫해 정말 빼어난 성적임에도

    너무 신인답지않다고 불이익을 받았고,,

    최동원은 자신이야 최고의 스타인데, 뭔 걱정 있으련만,,자신보다 어려운 선수들을 보호한다는

    총대를 메었다가,, 김시진과 함께,,불명예스럽게 트레이드나 되고.....

    새까맣게 어린 유중일이 감독하는 곳에서,, 그리고 김경문 . 박종훈. 김시진 등등 감독들도 잘하는데,

    자신들의 처지가 한심하다는 자학적 생각으로.. 얼마나 긴 시간을 고뇌하고 방황했을까?

    얼마나 많이 스스로에게 억울했을까?

    그런 것이 원인이었을 것이라고 미루어 짐작했었다.

     

    장효조가 죽던 날도 ,, 최동원은 <나는 괜찮다..>라고 말을 했다던데....

    그런 자존심...

    어쩌면 썩을놈의 자존심....

    어쨋든 마음 아프다..

    그들이 나랑 같은 시대에 청춘의 꿈을 함께 하고 살았던 이들이기에...

    젊은 날의 나의 환성을 한껏 들을 자격이 있던 자들이기에, 그들의 젊은 날 죽음이 안타깝다.

    장효조 죽던 날 하루인가 이틀 후에 문자가 하나 왔었다.

    잘 모르는 고등학교 동기인데 주검을 맞이 했다고...

    아~~~~~아직은 젊다... 생각하는데,, 하나 둘 가는 구나..

    만약에 나도 이렇게 가면,, 일도 이루지 못하고 억울해서 어쩌누~~~생각이 스치던..

    그만큼 장효조의 죽음앞에는 무엇인가 글 하나 남기고픈 맘이 많았었는데,,

    최동원이라는 또 한 친구가 사라지니.....

    조금은 허망하고 두렵다..

    그들에게 참 평안한 하늘나라가 존재하기를 빌면서...

    하늘에서는 정말 야구만 사랑하는,,그런 야구만 하시요...

    돈과 명예와 권력과는 상관없는.....

     

    청춘~~~

    청춘~~~~

    사무엘울만의 글을 새삼 떠올리고픈 날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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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빛이 강하면 그늘은 더 짙어지는 게 세상사다. 현역 시절 그 누구보다 뛰어난 기량으로 스포트라이트를 받았던 스타플레이어들의 뒤안길은 그래서 더 쓸쓸하고 고독했다. 세상은 그들의 천재성을 주목하고 우러러봤지만 그들의 인간적인 고뇌를 모두 끌어안지는 못했다.

    직장암으로 유명을 달리한 최동원 전 한화 2군감독은 자존심과 오기로 똘똘 뭉친 인물이었다. 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했고, 나약한 모습을 절대 드러내지 않았다. 그가 끝까지 투병 사실을 부인하고 숨기려 했던 것도 그래서다. 2007년 대장암 발병으로 수술을 받은 사실이 알음알음 알려졌지만 병세가 호전된 이후 한국야구위원회(KBO) 경기운영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지금은 완쾌됐다. 건강에 아무 이상이 없다"고 큰소리쳤다. 지난해부터 암이 재발해 힘겨운 투병 생활을 재개해야 했지만 주변엔 전혀 아픈 내색을 하지 않았다. 건강을 묻는 지인들에게 오히려 더 큰 목소리로 "무슨 소리냐?"고 반문했고, 지난 달 군산상고와 경남고의 레전드 올스타전에 눈에 띄게 수척해진 모습으로 참석했을 때도 "식이요법으로 살을 뺀 것 뿐"이라며 걱정하는 지인들을 안심시켰다.

    그러나 병마와의 힘겨운 싸움은 '철인'조차 서서히 무너뜨리고 있었다. 최 전 감독은 2007년 대장암 수술을 전후로 방사선 치료를 포함한 항암 치료를 받았지만 재발한 이후엔 스스로 항암 치료를 거부한 것으로 밝혀졌다. 항암 치료가 너무나 고통스러웠고, 초라해진 모습을 드러내고 싶지 않아서였다. 그는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항암 치료는 받지 않겠다"고 버텼다. 대신 꼿꼿한 모습으로 암과 정면승부를 치르기 위해 민간요법을 선택했다.

    최 전 감독보다 일주일 앞서 돌아올 수 없는 길을 떠난 장효조 삼성 2군감독도 은퇴 이후 초라한 자신의 모습을 비관해 자살을 시도했던 적이 있다. 장 감독은 2000년대 초반 미국 출장길에서 만난 지인에게 "초라한 내 모습을 들여다보고 스스로 목숨을 끊으려 했었다"고 털어놓았다. 현역 시절 최고의 스타로 대접받던 그가 은퇴 이후 지도자로서 제대로 자리잡지 못하는 현실과의 괴리 때문에 한때 심각한 우울증에 사로잡혔다는 것이다. 그는 강한 정신력과 야구에 대한 열정으로 우울증을 극복하고 후배들을 지도하는 데 헌신적인 노력을 기울였지만 수년간 누적됐던 스트레스는 결국 그에게 위암과 간암을 동시에 선고하고 말았다. 장 감독 또한 약해진 자신의 모습을 감추기 위해 지인들의 병문안까지 사절하며 끝까지 외롭게 병마와 싸웠다.

    비범했기 때문에 은퇴 이후 보통 사람들보다 더 힘든 통과의례를 겪어야 했던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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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0년대 풍미한 투타 최고의 선수들
    '강철어깨'최동원 80경기 완투…
    장효조 통산타율 3할3푼1리 대기록

    선수협의회 결성 시도에 내쫓기고
    시장논리에 눌려 꺾여버린 날갯짓

    명예감독·영구결번등 전설의 예우
    한국스포츠 본질 다시 생각할 때…


    2011년 9월


    우리는, 한국야구는 너무 쉽게 그들을 잃었다. 80년대를 풍미한 '강철어깨' 최동원과 '영원한 3할타자' 장효조다. 불과 10년 남짓한 프로야구 선수생활을 하는 동안 그들은 아무도 따라오지 못할 대기록과 위대한 플레이를 남겨놓았다. 103승을 거둔 최동원은 무려 80경기를 완투했고, 장효조는 통산타율 3할3푼1리라는 거대한 족적을 남기고 떠났다.

    하지만 한국야구사에서 최동원과 장효조라는 거목은 승수와 타율이라는 단순한 잣대로 가늠할 수 없다. 최동원보다 나은 투수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오승환보다 묵직한 직구와 활처럼 휘는 커브, 화려한 키킹을 앞세운 역동적인 피팅으로 타자들을 KO시킨 투수는 최동원 외에 없었다. 장효조보다 홈런을 많이 친 이승엽도 있었고, 방망이를 거꾸로 잡아도 3할을 친다는 양준혁도 있었지만 어떤 공도 쳐낼 것 같은 스윙과 임팩트 능력을 갖춘 선수는 장효조 외에 없었다.

    그들이 이땅에 머문 시간은 불과 50년 남짓했지만, 그들이 남긴 발자욱과 그림자는 너무나 깊고도 짙다.

    1982년 9월

    막 프로야구가 태동한 그해 서울에서 세계야구선수권대회가 열렸다. 이선희 김시진 등 쟁쟁한 선수들이 프로로 진출해버린 한국은 최동원 선동렬 장효조 김대화 한대화 등을 내세웠다. 장효조는 이 대회 때문에 프로야구 진출을 미뤄야 했다. 결국 결승에서 한대화의 결승 3점홈런으로 한국은 우승을 차지했다. 아마시절 최동원과 장효조가 태극마크를 달고 마지막 영광을 함께한 순간이다.

    1973년


    장효조는 대구상고-한양대를 거쳐 포항제철과 경리단에서 선수생활을 했다. '영원한 3할타자'인 장효조는 고교와 대학 및 실업시절에는 당연히(?) '4할타자'에 타격상 수상을 밥먹듯 했다. 고교 2학년 때인 73년 봉황대기, 황금사자기 타격왕이었고, 74년 대통령기에서도 5할을 쳐 타격상을 받았다. 투수들에게 장효조는 피해가고 싶지만 피할 수 없는 거대한 산이었다.

    1975년


    최동원은 경남고-연세대를 거쳐 아마 롯데에서 뛰었다.

    최동원은 75년 전국우수고교초청대회에서 17이닝 연속 무실점을 기록했고, 76년 청룡기에서는 1경기 20탈삼진 기록을 세웠다. 연세대 시절이던 78년에는 대통령기 준결승에서 동아대를 상대로 연장 14회까지 0-0 무승부를 기록한 뒤 이튿날 이어진 경기에서 18회까지 완투해 1-0 승리를 거뒀다.

    게다가 불과 몇 시간 뒤 이어진 성균관대와의 결승에서 다시 마운드에 올라 9이닝을 완투하며 3-2 승리를 거뒀다. 이틀간 27이닝 동안 375개의 투구를 했다.

    그의 강철어깨는 이미 인간의 것이 아니었다. 84년 한국시리즈에서 5경기에 등판해 혼자 4승을 따내고, 87년 해태 선동렬과의 15회 완투대결 무승부를 기록했다.

    1988년


    '영원한 부산사나이'일 것 같았던 최동원은 88년 선수들의 권익보호를 위해 선수협의회 결성을 시도했고, 이를 못마땅하게 여긴 롯데는 시즌 후 삼성 김시진과 맞트레이드를 단행했다.

    만약 계속 롯데에서 뛰었다면 최동원이 어떤 기록을 세웠을지 모르지만 이후 의욕을 잃은 최동원은 90년을 끝으로 마운드를 떠나고 말았다. 그때 이미 한국야구 최고의 투수 최동원은 죽었다.

    그에 앞서 88년 1월 삼성은 전년도 MVP였던 장효조를 트레이드 시장에 내놓았다. 장효조가 부동의 3할타자지만 큰 경기에 약하다는 것이 삼성이 밝힌 이유. 그러나 매년 구단의 연봉제시액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이지 않던 장효조가 눈에 거슬렸던 삼성은, MVP를 수상했는데 500만원을 인상하는 데 그쳤고, 장효조가 반발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카드를 꺼내든 것이다.

    우여곡절 끝에 장효조는 88년 삼성에서 뛰었지만, 결국 이듬해 김용철과 2대2 트레이드되며 대구를 떠나 롯데유니폼을 입는다. 대구가 낳은 불세출의 강타자 장효조의 방망이도 이때 꺾였다.

    그리고 그 후…


    이제 그들이 세상을 떠나고 나자, 구단들은 명예감독이나 영구결번이니 하는 말을 입에 담는다. 하지만 그들 인생의 전부였던 야구를 빼앗아갔던 것은 그들이었다. 그것이 결국 최동원 장효조의 마음속에 치유할 수 없는 병을 키웠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암세포는 그들의 몸을 갉아먹었지만, 이미 그들은 23년 전 생겨난 마음의 암세포에 이미 지칠 대로 지쳐 있었는지도 모른다. 한 번 날개가 꺾인 천재들은 다시 날갯짓을 할 수 없었다.

    오가와 요코가 쓴 '박사가 사랑한 수식'의 주인공 박사는 교통사고로 기억이 80분밖에 지속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에게는 80분마다 사라지는 기억 속에서도 영원히 잊히지 않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한신 타이거스의 명투수 에나쓰 유타카에 대한 기억이다.

    우리도, 한국 야구팬들도 박사처럼 최동원의 역투와, 장효조의 호타를 영원히 잊을 수 없을 것이다. 하늘은 한국야구의 천재 2명을 데려갔지만, 대신 사라지지 않을 전설을 남겨주었다.

    김성진 기자/ withyj2@herald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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