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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400백년 전의 편지
    좋은 시, 좋은 글 2013. 5. 16. 12:03

    1998년 안동시 정상동 택지개발지구에서

    이름모를 무덤을 이장하는 중에 미이라가 한구 발견되었다.

    시신을 보호하는 외관은 갓 베어 놓은듯 나무결이 살아 있어

    혹시 최근에 조성된 무덤이 아닌가 생각되었다.

    하지만 밤늦게까지 발굴작업이 진행되자  수백년전에 조성된 조선시대의 무덤이란것을 알수 있었다.

     

    그 속에는 망자를 덮고있는 옷가지와 여러가지 소품들이 온전이 그대로 썩지 않고 보존 중이었는데,

    무덤속의 망자는 고성 이씨  이응태(1556~1586년)의 묘로서,

    먼저 젊은 나이(31세)에 요절한 남편을 그리는

    애절한 사연이 담긴 아내 (원이엄마)의 편지와, 살아생전에 남편의 회복을 기원하는

    삼베와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만든 미투리가 발견되었다.(신발길이 23cm,  넓이 9cm)

     

    이응태는 고성 이씨의 17대 손으로 아버지 이요신(李堯臣, 1523~1611)의 2남 3녀 중 둘째 아들이다.

    이응태는 죽기 전 얼마간 병석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젊은 남편이 병석에 눕자 아내는 남편의 병이 낫기를 기원하면서

    자신의 머리카락과 삼을 함께 엮어 정성껏 미투리를 삼았다.

    그러나 남편은 끝내 그 신을 신어 보지도 못하고 저 세상으로 가버리고 말았다.


    400년전 진실로 서로를 사랑하며 백발이 될때까지 함께 해로하고자 소망했던

    이응태 부부의 육신은 비록 떨어져 있을 지언정 그들의 영혼은 지난 세월 동안에도 줄곧 함께였다.

    죽음조차 갈라 놓을수 없던 이응태 부부의 사랑,,,

    긴 어둠의 세월 속에서 이 사랑을 지켜온 것은 아내가 써서

    남편의 가슴에 고이 품어 묻어둔 마지막 편지였다.

     

    KBS TV <역사 스페셜>에서는 ‘조선판 사랑과 영혼’ 프로그램으로 방영 되었고,
    무덤이 발견되었던 자리에 아가페라는 동상이 세워졌으며,
    안동댐에는 월영교라는 아름다운 목조다리가 세워지고 다리 끝에는  
    미투리 모형으로 정자를 만들어 기념하고 있다.

    그 미투리 사진이 내셔널 지오그래픽(National Geographic)지 2007년 11월호에
    ‘사랑의 미투리’ 란 제목으로 기사화 되었다.

     

     

     

     

                                                             [  편  /  지  /  전  / 문  ]

     

     

    당신이 항상 내게 다짐하길

    둘이 머리 희어지도록 살다가 함께 죽자 하시더니 어찌 나를 두고 당신 먼저 가시나요.

    나와 어린아이는 누구의 말을 듣고 어떻게 살라고 다 버리고 당신 먼저 가시나요.

    당신이 나에게 마음을 어찌 가져왔고 나는 당신에게 어떻게 마음을 가져 왔나요.

     

    언제나 나는 당신에게 말하곤 했지요.

    함께 누워 새겨보곤 했지요.

    남들도 우리처럼 서로 어여삐 여기고 사랑할까요.

    남들도 정말 우리 같을까요.

    어떻게 그런 일들 생각하지도 않고 나를 버리고 먼저 가시나요.

    당신을 여의고는 아무래도 나는 살수 없으니 빨리 당신에게 가고 싶으니 나를 데려가 주세요.

     

    당신을 향한 마음 이승에서 잊을 수가 없고 서러운 뜻 한이 없으니

    내 마음 어디에 두고 자식 데리고 당신을 그리워하며 살 수 있을까요.

    이 내 편지 보시고 내 꿈에 와서 자세히 말해주세요.

     

    꿈속에서 당신 말을 자세히 듣고 싶어서

    이렇게 써서 넣어 드리니 자세히 보시고 나에게 말해 주세요.

     

    당신 내 뱃속의 자식 낳으면 보고 말할 것 있다하고는

    그렇게 가시니 뱃속의 자식 낳으면 누구를 아버지라 하라시는 건가요.

    아무리 한들 내 마음 같을까요.

     

    이런 슬픈 일이 하늘 아래 또 있을까요.

    당신은 한갓 그곳에 가 계실 뿐이니 아무리 한들 내 마음같이 서러울까요.

    한도 없고 끝도 없어 다 못쓰고 대강만 적습니다.

    이 편지 자세히 보시고 내 꿈에 와서 당신 모습 자세히 보여주시고 자세히 말해 주세요.

    나는 꿈에서 당신을 볼 수 있다고 믿고 있으니 몰래 와서 보여주세요.

    하고 싶은 말 끝이 없으나 이만 적습니다.

     

     

     

     

     

                                               [ 애절한 사연을 기리고자 후세에 건립된 건립비 ]


     

     

     

     

     

     

                                          [  약 420년후에 발견된, 무덤에서 나온 한글 편지전문 ]

     

     

     

     

     

     

                                             [ 머리카락과 삼베를 섞어만든 미투리  ]                

     

     

     

     

     

                                          [  부인의 사랑을 기리고자 후세인들이 안동댐에 만든 월릉교  ]

     



     

     

     


    1.세상은 제자리로

     

    곡하던 대, 소가의 어른들과 아이들은 제 집으로 떠났습니다.

    방석은 제자리에 있고, 병풍은 벌써 걷었습니다. 막종이는 손에 침을 뱉어가며 장작을 패고,

    늙은 박 서방은 너른 마당에 종일 게으른 비질을 합니다.

    박 서방의 힘에 겨운 신음소리가 방안까지 들려 안쓰러운 마음이 일어납니다.

    원이는 동네 아이들과 몰려다니며 까르르 웃음을 터뜨립니다. 시아버님은 끼니를 거르지 않았습니다.

    아주버님은 예의 호탕한 웃음을 짓고, 턱수염을 절도 있게 쓰다듬습니다.

    이번에 임해 군수로 자리를 옮기셨습니다.
      
    세상은 더 이상 울지 않고, 흔들리지도 않습니다. 모두 제자리를 찾아, 가고 왔습니다.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사위는 고요했습니다. 너무 고요해서 제가 꿈속에서 운 것은 아닐까 싶습니다.

    당신이 떠난 줄 알지만 저는 자주 놀랍니다. 낮은 발소리에도 놀라고 낙엽 뒹구는 소리에도 놀랍니다.

    나뭇잎이 공연히 떨어지고 발소리가 저 혼자 날 리 있겠습니까.

    저는 잎 지는 소리에 당신이 왔음을 압니다. 초겨울 빈 가지에 걸린 달빛이 홀로 외롭습니다.

     

     

     

    2.비내리는 밤에

     

    시숙이 목단 씨앗 몇 개를 갖다 주셨습니다.

    "꽃이 붉고 아름다우니 뜰에 심어두고 즐기시기 바랍니다"라고 하셨습니다.

    여름 내내 바람 한 줄기 없었던 모양입니다. 아무리 기다려도 뜰 안엔 목단 향기가 나지 않습니다.

    아니에요, 사실은 바람 탓이 아닙니다. 무엇이 잘못 되었는지 씨앗 중에 대부분은 죽고

    겨우 싹이 난 몇 개도 꽃을 피우지는 못했습니다. 무엇이 잘못 되었을까요?

    햇볕이나 물이 부족했을까요?

    하기야 꽃을 피우지 못할 바에야 차라리 싹조차 트지 않는 편이 낫습니다.
      
    저는 당신이 떠나지 않았음을 압니다. 죽음이 사람을 갈라 놓을 수 없음도 압니다.

    차가운 냉기 속에서도 당신의 체온을 느낄 수 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도 당신의 미소를 볼 수 있습니다.

    소쩍새마저 잠든 밤에는 당신의 목소리를 듣습니다.
      
    자시를 지날 무렵부터 비가 내렸습니다.

    마당에 엎드려 졸던 개가 몸을 부르르 떨며 대청 아래로 기어듭니다.

    비는 소리도 없었지만 저는 뜬눈으로 밤을 새웠습니다.

    겉흙에 입힌 떼는 해가 바뀌어도 뿌리를 내리지 못했습니다. 당신은 어디에서 찬바람을 피하시는지요.

    소리 내지 않고 일어나 안채로 연결된 중문의 고리를 비껴내고 방문 걸쇠를 풀어둡니다.

    대청마루 삐걱대는 소리가 고요한 밤에 천둥처럼 크게 들립니다.

    행여 누가 깨지는 않았을까요. 공연히 어른들께 걱정을 끼칠까 두렵습니다.

    젖은 시간은 참 더디게 갑니다. 꽃향기 가득하고 나비가 날던 시절,

    시간은 얼마나 우리를 재촉했는지요.

    부산을 떨던 세월은 언제 그랬냐는 듯 뒷짐 지고 느릿느릿 걷습니다.

    그렇게 더디 걷는 세월을 앞지를 수 없음이 안타깝습니다.

    아무리 걸음을 빨리해도 느릿느릿 걷는 세월의 뒷모습만 보입니다.

    어서 가자고 재촉해도 심술궂은 세월은 얄미운 뒤통수만 흔들어댑니다.
      
    사람은 떠난 후에야 비로소 그리워지는 법입니다. 하물며 우리는 함께 있어도 그리워했는데

    당신이 가시고 없으니 그리움이야 오죽하겠습니까. 강물은 굽이굽이 만나고 헤어지기를 거듭하지만

    끝내 다시 만나는 법이라고 하셨지요.

    걸음을 재촉한 강물도, 더디 흐른 강물도 바다에서 만나기는 매한가지라고

    당신은 힘겨운 목소리로 말씀하셨지요. 저는 당신이 힘겹게 이어가신 말씀을 잊지 않았습니다.

    당신은 서둘러 떠나셨고 저는 남았지만 우리는 바다에서 만날 것입니다.

     


     

    3.벌나비가 찾지않는 꽃

     

    행랑채 아범 박 서방이 아침저녁으로 비질을 하지만 마당에는 잡풀이 무성합니다.

    박 서방의 힘없는 비질이 지나고 난 자리에는 잡풀이 여전히 고개를 뻣뻣이 세우고 서 있습니다.

    박 서방의 팔에서는 힘이 빠졌지만 새로 솟아나는 풀에는 생기가 넘칩니다.

    사람은 나서 병들고 늙어 죽는데 세상은 변하지 않는 모양입니다.
      
    꽃들은 피고 지기를 거듭하지만 벌과 나비가 찾지 않습니다.

    빗물 머금은 나무는 여름 햇볕을 받아 무성하지만 새들은 더 이상 노래하지 않습니다.

    승회, 당신은 얼굴도 보지 못한 아이입니다. 아장아장 걷던 승회가 뜀박질을 하기 시작했고

    제 형과 더불어 소리 내어 웃지만 웃음소리는 들리지 않습니다.

    비 온 지 오래지만 젖은 기왓장은 좀처럼 마를 기미를 보이지 않습니다.
      
    풍문도 많았습니다. 서방을 잡아먹은 년이라는 소문이 담을 넘어 안채까지 기웃거렸습니다.

    어찌나 흉측한지 처음엔 깜짝 놀랐습니다. 시커먼 얼굴에 손질하지 않은 수염이 덥수룩한 소문은

    누런 이를 드러내고 키들거렸습니다. 저는 갑자기 늙어버렸습니다.

    아직 머리에 눈이 내릴 나이는 아닙니다. 가을바람이 불던 날 검은 머리에 흰눈이 내렸습니다.

    시아버님은 안채 건넌방 뒤에 별채를 새로 지었습니다. 하회당입니다.

    굳이 제 생각을 물어 지으신 이름입니다. 강물처럼 돌아 흘러 만난다는 말입니다.

    바라지창을 열면 후원의 장독대가 들어옵니다.

    키 작은 산죽이 바람을 맞아 바스스 울고 장독대는 햇볕을 받아 빛납니다.
      
    별채에 앉으면 더 이상 소문이 들리지 않습니다. 소문은 더 이상 담을 넘지 않습니다.

    아무도 제 울음소리를 들을 수는 없습니다.

    거기에 앉으면 가까운 곳이나 먼 곳에서 나는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제 울음소리를 잊었지만 저는 울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봄이 가고 여름이 가고 가을과 겨울이 오고 갔습니다. 풍문과 소문은 연기처럼 사라졌지만

    저는 별채에 앉아 울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집 뒤란 너머 대숲이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연못에서는 빗살 같은 물결이 일어났다가 사그라집니다.

    왔다가 떠날 바람이 다시  찾아왔는가 봅니다.

     

     

     

    4.행랑채를 허물고

     

    시아버님이 머무시던 사랑채를 허물었습니다. 낡은데다 기와 얹은 지붕에서 비가 샜습니다.

    시숙은 사랑채를 허물고 그 자리를 비워둘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리고 더 늙어 수염이 반백이 됐을 때 다시 지어 들어가리라 하셨습니다.
      
    소문은 얼마나 빠른지요. 집 헌다는 소리에 여기저기서 소목장들이 지게를 지고 몰려왔습니다.

    하루에 한두 명씩 닷새 넘게 사람들이 기웃거렸습니다.

    영주에서 온 소목장이 있었고 봉화에서 온 소목장도 있었습니다.

    맨 나중에 멀리 경주에서 온 소목장은 빈손으로 돌아서야 했습니다.

    소목장들은 저마다 입맛에 맞는 나무를 챙겨서 돌아갔습니다.

    기둥과 들보는 말할 것도 없고 사랑방 뒤에 두었던 오래된 나무 절구통에 눈독을 들인 소목장도 있었지요.
      
    가구 짓는 소목장들은 어디서 집 헌다는 소문이 들리면 천리 길도 마다 않고 찾아다닙니다.

    나무는 물기가 빠지면서 뒤틀리고 줄어들어 모양이 바뀐다고 당신이 말씀해주셨지요?

    물기가 다 빠지지 않은 나무로 가구를 만들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라고 하셨지요?

    소목장들이 집 헌다는 소문이 들리면 천 리 길을 마다않고 찾아가는 까닭이 거기에 있다고 하셨지요?
      
    당신이 살아 계시던 때 친정집에서도 별채 하나를 헐었지만

    백 리를 달려온 소목장들은 빈손으로 돌아서야 했습니다.

    당신은 허문 별채에서 나온 나무를 자투리 하나 버리지 않고 챙겼습니다.

    그 나무 모아 옷장 짜고, 상자 짜고, 책상도 짰습니다.

    손가락이 맞물린 것처럼 양쪽 나무가 서로 맞물리게 사개짜임으로 옷장을 짰고,

    다리를 끼울 때는 직각으로 목재를 연결하고 장부짜임과 연귀짜임으로 멋과 단단함을 얻어냈습니다.

    잘라낸 나무를 붙이고 떼기를 거듭했지만 못 하나 쓰지 않았습니다.

    그런 기술을 언제 누구한테 배우셨는지요?

    이제 사랑채 허물고 좋은 나무들이 나왔지만 작은 책상 하나 짜 맞출 사람이 없습니다.

     

     

     

    5.친정으로 돌아와서

     

    흥구의 친정으로 돌아왔습니다. 거기서 죽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었습니다.

    어른들과 친지들이 결정하신 일입니다.

    시아버님은 살아 계실 때 제 얼굴을 마주하시는 것을 무척 힘들어하셨습니다.

    시아버님은 단 한번도 당신의 마음속 고통을 내색하지 않으셨지만  그 깊은 뜻을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당신이 떠나고 작은아버님께 하운 스님의 예언을 들었습니다.

    시아버님이 그동안 얼마나 마음을 졸이며 살아오셨는지 친정아버지와 어머니의

    가슴 졸임을 보아온 저는 짐작하고도 남습니다.

    시아버님이 돌아가시고 일가친척들이 결정하신 일입니다. 어찌할 도리가 없는 일입니다.

    당신과 함께 천렵하던 반변천은 여전히 소리 내며 흐르지만

    냇가를 메우던 웃음소리는 사라지고 없습니다.

    미름米?(쌀창고)은 비어있고, 뜰에는 잡초가 무성합니다.

    당신이 호랑이를 잡으려고 만드신 벼락틀은 비 맞고 바람 들어 버섯이 자랍니다.

     

     

    호랑이를 잡아야 할 벼락틀이 버섯에 허물어집니다. 당신이 먼저 떠나시고

    그 해 가을 친정아버지가 떠나셨습니다. 친정아버지는 고운 사위 잃은 아픔을 견디지 못하셨습니다.

    더 이상 손들은 찾아오지 않고 문지방엔 먼지가 보얗게 앉았습니다.

    사계절 제철 따라 꽃이 피던 담벼락엔 칡넝쿨이 기어오릅니다.

    이 모두가 당신이 계시지 않기 때문임을 저는 압니다.
      
    함께 먼 길을 온 아이들은 '여기가 외갓집'이라며 겅중겅중 뛰어다녔습니다.

    아이들은 마당 흙을 파며 놀다가 함께 온 막종이를 따라 안동으로 돌아갔습니다.

    낮잠이 든 승회를 막종이가 등에 업고 떠났습니다. 아무것도 모르고 쌔근쌔근 잠자던 우리 승회,

    깨고 나서 엄마가 없으면 울 텐데요. 엄마가 보고 싶다고 얼마나 울어 젖힐까요.

    한번 울면 쉬이 그치는 아이가 아닙니다. 막종이가 승회의 서러운 울음을 어떻게 달랠까요.

    고샅을 나서던 원이는 자꾸 뒤를 돌아보며 "엄마는 왜 같이 가지 않느냐"고 묻습니다.

    "곧 따라 가마"라고 말하고 초당으로 들어와 소리 죽여 울었습니다.

    방문 열고 들어온 친정어머니가 제 어깨를 붙잡고 오래오래 우셨습니다.

    박복한 저는 기어이 어머니 가슴에 대못을 박고 말았습니다.

    막종이 등에 업혀 잠자던 승회의 작고 측은한 어깨를 지울 수가 없습니다.

     

     

     

    6.봄

     

    남쪽 가지에는 꽃이 피었는데 북쪽 마른 가지에는 겨울바람이입니다.

    봄나물 캐서 돌아오는 아낙들의 노래가 시끄럽습니다.

    광주리마다 한가득 담긴 웃음소리가 걸음을 옮길때마다 철철 넘칩니다.

    계곡 물은 시끄럽게 떠들어대고 물고기들은 요동치며 물을 거슬러 오릅니다.
      
    우리 함께 걷던 개울가엘 갔습니다. 당신과 제가 원이의 손과 바람에는 단내가 묻어 있었습니다.

    길가 수양버들은 능청댔고, 꽃송이 속에 머리를 박은 벌들이 종일 잉잉댔습니다.
      
    그런 봄입니다. 삼라만상에 꽃 비단이 펼쳐졌지만 안채 마당에는 눈이 바람에 날립니다.

    봄인 줄 알고 장지문을 열어놓았더니 겨울바람이 휑하니 쓸고 지납니다.

    당신 계신 그 먼 땅에도 봄이 왔습니까? 능청대던 수양버들 오간 데 없고 눈비만 어지러이 흩날립니다.

    개울물은 더 이상 노래하지 않고, 바람에는 날카로운 쇠 비린내만 가득합니다.

    다정했던 길은 멀기만 하고, 힘없는 제 몸뚱이는 비척비척 치맛자락을 밟습니다.

     

     

     

    7.대보름을 준비하며

     

    대보름이 며칠 앞으로 다가왔습니다. 부럼을 깐다. 오곡밥을 짓는다.

    귀밝이술을 담근다며 이웃들은 분주합니다. 당신은 너그러운 분이셨습니다.

    무인 집안 사람의 고집을 피우지 않았습니다. 무인은 분명한 적과 싸우는 사람이라고

    입버릇처럼 말씀하셨지만 정월 보름이면 어김없이 달을 보며 풍년 농사를 빌었습니다.

    당신이 두 손을 모아 비는 모습은 여느 촌부들처럼 어울리지는 않았습니다.

    어딘가 어색하고 웃음이 나오는 때도 있었습니다.

     

     

    옆에 선 제가 소리 내어 웃을 때도 당신은 빌기를 멈추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보름달을 향해 비는 모습을 보고 있노라면 아직 씨앗을 뿌리지도 않았지만

    누렇게 익은 논밭을 눈앞에 보는 듯했습니다. 하기야 당신이 우리 집으로 오시고

    어느 핸들 풍년 아니 든 해가 있었는지요. 지성이면 감천이라는 말은 빈말이 아니었습니다.

    당신은 보름달을 보며 진정으로 빌었고 보름달은 풍년 농사를 약속했습니다.

    참으로 등 따습고 배부른 날들이었습니다.
      
    대보름이 한참 지나고 산 속 골짜기에는 아직 눈과 얼음이 남아 있었습니다.

    그런 날에도 당신은 밭으로 나가 굳은 땅을 헤집었습니다. 솔가지를 찍어다가 울타리를 새로 하고

    집 안팎 흙 담도 손을 봤습니다. 바람나는 벽엔 흙은 발랐고, 창호를 막고 쥐구멍을 막았습니다.

    겨우내 얕아진 개천도 쳐 올렸습니다. 날이 풀리고 비가 내리면 살찐 물고기들이

    개천을 따라 올라올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런 날이 오면 함께 개천에 나가 물고기를 잡자고 하셨습니다.
      
    당신은 귀하게 자란 몸이지만 농가의 일을 농부보다 더 잘 알았습니다.

    그루갈이 모 심기에 소의 힘을 빌리려면 잘 먹이고 돌봐야 한다며 겨우내 부지런을 떨었습니다.

    끼니를 거를지언정 소 돌보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보릿짚을 말리고 솔가지를 많이 쌓아

    장마 걱정을 없도록 했습니다. 한겨울을 보내고 얼음이 녹을 무렵이면 다른 집 소들보다

    두 배쯤 살찐 우리 집 소가 외양간을 나와 느릿느릿 밭으로 나가곤 했습니다.

    그 뒷모습이 얼마나 듬직했는지 눈물이 날 뻔 했습니다.
      
    기억하고 계시는지요. 몇 해 전 유월 늦여름엔 큰 비가 내리고 더위가 극심했습니다.

    천지는 초록으로 무성했고 파리와 모기가 어지럽게 날아다녔습니다.

    당신은 참개구리 소리를 들으며 봄보리, 밀, 귀리를 차례로 거둬들이고

    늦은 콩, 팥, 조, 기장을 심어 땅이 쉬지 않도록 했습니다.

    쉴 틈 없는 땅이 지치지 않도록 김매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습니다.
      
    장마가 지난 뒤에는 집 안을 돌며 곡식에 바람을 쐬었습니다.

    집 뒤 거친 땅을 갈아엎어 가꾼 면화밭을 자주 살펴

    일찍 익은 목화가 피었는지 살펴 거둘 채비도 하셨지요.

    저는 당신을 따라다니며 옷가지와 베갯잇을 말렸습니다.

    눅눅하던 옷가지와 이불은 한나절 햇볕에 바스락 소리를 낼 만큼 까슬까슬 했습니다

     

     

     

    8.술을 빗으며

     

    친정아버지는 술을 좋아하시지 않았습니다.

    손들이 와서 함께 몇 잔을 마시면 이내 얼굴이 붉어지셨습니다.

    맨 처음 당신과 마주 앉아 청주를 마시던 날 아버지는 종일 抉恬? 지우지 않으셨습니다.

    아마 친정아버지가 그처럼 기분 좋게 술을 많이 마신 것을 그때가 처음일 겁니다.
      
    아버지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사위는 인물이 이렇게 좋구나.

    우리 사위는 키가 이렇게 크구나. 우리 사위는 손이 듬직하구나.

    우리 사위의 어깨는 이렇듯 힘이 있구나.

    우리 사위는 이렇게 사냥을 잘하는구나. 우리 사위는 이렇게 지게가 잘 어울리는구나.

    우리 사위는 잠을 이렇게 잘 자는구나. 우리 사위는 이렇게 술을 잘 마시는구나.

    우리 사위는 이렇게 밥을 잘 먹는구나. 우리 사위는 이렇게 목소리가 크구나.
      
    술 잘 마시고, 목소리 큰 것이 무슨 큰 자랑이겠습니까.

    그러나 친정아버지에게 당신은 친자식이었습니다. 무슨 일을 해도 어여쁘고,

    무엇을 맡겨도 걱정이 없을 믿음직한 자식 말입니다. 부모님께 저는 걱정거리였습니다.

    일곱 살 이후, 옆집 일꾼 종니가 죽은 여덟 살 때부터였던가요?

    어쩌면 어머니와 아버지는 그전부터 불운을 안고 살아오신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떠돌이 중의 한마디에 그처럼 안절부절못했을까요?
      
    친정에서도 여느 양반집처럼 철마다 술을 담그기 시작한 것은 당신이 저와 결혼하고

    친정에 머물기 시작하면서부터입니다. 술을 마실 사람이 생겼고,

    술을 마실 벗을 끌고 집안을 왁자하게 만들 사람이 생겼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미더운 사위를 얻고 나서야 아버지도 술을 가까이하실 엄두를 내셨는지도 모릅니다.
      
    정월에는 솔술을 담갔고, 이월에는 매화주를, 삼월에는 진달래 붉은 꽃잎을 따다가 술을 담갔습니다.

    친정집에서는 삼짇날 진달래꽃으로 화전을 부쳐 먹었지만 당신이 우리 집으로 오신 뒤로

    진달래꽃을 따다가 두견주를 담갔지요. 아버지는 꽃에 꿀이 많아 술에 단내가 난다며

    두 잔을 거푸 마시곤 했습니다. 사월에는 난초뿌리를 캐내서 술을 담갔습니다.

    꽃도 줄기도 시들어 죽은 줄 알았는데 난초는 살아있었습니다.

    그 향이 얼마나 좋은지 향기를 맡아보라며 징그러운 난초뿌리를 제 코앞으로 쑥 내밀며 웃던

    당신의 웃음소리가 귓가에 들리는 듯합니다.

     

     

     

    9.아이가 다녀갔어요

     

    몸뚱이는 이전의 몸뚱이가 아닙니다.

    자리를 털고 일어서려면 끙 소리가 제 먼저 알고 입 밖으로 튀어나옵니다.

    행여 친정어머니가 들으실까 두려와 아랫배에 잔뜩 힘을 주고 입단속을 해야 합니다.
      
    안동에서 원이가 다녀갔습니다. 키가 훌쩍 커버린 원이에게서는 언뜻언뜻 청년 티가 납니다.

    키가 큰 원이의 걸음걸이가 당신의 걸음걸이와 무척 닮았습니다.

    땅거미가 내릴 무렵 저 혼자 마당을 거니는 원이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세월은 강철을 녹이고도 남을 힘이 있다고 했던가요.

    그러나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는 것들이 있음을 저는 자주 확인합니다.

    원이를 따라온 막종이는 "승희 도련님도 서방님을 쏙 빼 닮았습니다"하고 묻지도 않은 말을 합니다.
      
    당신은 어디에 계시는지요? 가끔 안동집에 들러 아이들 얼굴이라도 보시는지요?

    아이들 꿈에라도 자주 오셔서 이야기를 나누시는지요?

    제 꿈에 오시듯 아이들 꿈에도 오셔서 당신과 제 이야기를 들려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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