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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운 이영도와 청마 유치환의 시와 사랑
    좋은 시, 좋은 글 2016. 7. 1. 00:22


    http://deoinga.egloos.com/3833025







    이수동


    유치환 장년의 사랑



    그를 말할때면 사람들은 이영도 시인을 말하고는 한다

    황폐하지 않은, 불모의 사랑이 아닌, 소중하고도 행복한 사랑,

    즉 주는 사랑을 20여년간 한 사랑...



    사랑하는 것은

    사랑을 받느니 보다 행복하나니라

    그리운 이여 그러면 안녕!

    설령 이것이 마지막 인사가 될 지라도

    사랑하였으므로 나는 진정 행복하였네라




    '감상'이 없는 불장난이 아닌 충실한 사랑을 짙게 물들여 그의 장년기를 수놓는 제2의 청춘 가로 채웠던 그는... 외로운 사랑을 했으며 죽음도 그 안에서 너그러운 사랑 속에 안길 수 있었다.

    그의 남성형 자세와 그 시풍이 도달한 종착점이 바로 <주는 사랑>의 행복한 연가로 폭을 넓히고 무르익었다. 영원한 것, 平常無事의 터득 속에서 익힌, 온화한 자애의 소근거림을 펼쳐 보이고 있다



    교육자이기도 한 그는 같은 학교에서 만난 이영도를 정신적으로 무척 좋아하였다.

    이미 처 자식이 있는 상태였던 그는 시조 시인이었던 그녀를 좋아하게 되었고 그가 부산에서 교통사고로 사망하기 전까지 그녀에게 200통의 편지를 쓰기도 하였다 그녀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중 추려모은 서간집이 《사랑했으므로 행복하였네라》(1967)이다

    이 작품에서 그의 장년기의 시를 자세히 알 수 있다



    이 서간집은 그의 사후에 출판한 것이다. 통영여자중학교 교사로 함께 근무하면서 알게 된 이영도(일찍이 결혼했으나 21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과 사별하고 당시 딸 하나를 기르고 있었다)에게 청마는 1947년부터 거의 하루도 빠짐없이 편지를 보냈다. 그러기를 3년, 마침내 이영도의 마음도 움직여 이들의 플라토닉한 사랑은 시작됐으나 청마가 기혼자여서 이들의 만남은 거북하고 안타깝기만 했다.



    청마는 1967년 2월 교통사고로 사망할 때까지 편지를 계속 보냈고 이영도는 그 편지를 꼬박 꼬박 보관해 두었다. 그러나 6 ·25전쟁 이전 것은 전쟁 때 불타 버리고 청마가 사망했을 때 남은 편지는 5,000여 통이었다. 《주간한국》이 이들의 ‘아프고도 애틋한 관계’를 <사랑했으므로 나는 행복하였네라>라는 제목으로 실은 것이 계기가 되어 청마의 편지 5,000여 통 중 200통을 추려 단행본으로 엮었다. 이영도는 이 책의 인세 수입을 한국문학사가 주관 하는 정운시조상 기금으로 쓰게 하였다.


    정운 선생이 타계한 뒤 무남독녀 박진아씨가 유품을 정리하니 미리 써둔 유서가 나왔고 유서에는 딸에게 사위에게 외손에게 부탁하는 말이 들어 있었다. 거기에는 죽음을 알릴 사람의 이름과 화장해 달라는 말, 그리고 장례비에 써 달라는 상당한 액수의 돈이 함께 들어 있었다.



    남에게 신세지기를 꺼리고 신세를 지면 갚으려고 하는 분이었기에 당신의 죽음 역시 비록 딸이지만 부담을 주지 않으려고 하였던 모양이다. 근검절약으로 일생을 부지런히 살았고 그것도 붓 한 자루에 연명된 삶이었으므로 풍족과는 아예 거리가 있었지만 그렇다고 궁색하지 않았던 삶으로 기억된다.



    따님이 급한 용처가 생겨 어머니께 돈을 빌리고자 하여도 그의 장례비는 건드리지 않을 만큼 철저하게 예비한 삶이었다. 택시를 타는 일이 거의 없고, 값비싼 음식을 사먹는 일이 없고 물건을 쌌던 포장 노끈까지도 잘 간수했다가 재활용하고 원고지 뒷면의 활용은 물론,편지를 쓰다가도 틀린 곳은 다시 종이를 덧붙여 썼다. 철 지난 달력의 아름다운 그림들은 잘 손질하여 화장실 부엌 같은 곳에 진열하기도 했다.



    자신의 삶을 이렇게 근검절약하면서도 남을 위한 배려는 돈독하였다. 후배 문인의 딱한 사정을 접하면 언제나 먼저 나서 도우고자 하였다. 그의 후덕에 힘입어 필자는 전문대학 교수가 되었는데 필자 뿐 아니라 후덕에 힘 입은 문인이 상당히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노산 이은상이 '언약'의 서문에서 이런 말을 하고 있다. '사향노루가 지나간 뒤에는 발자욱 닿은 풀끝마다 향기가 끼치듯이, 그는 어디론지 가버렸건만, 향내 머금은 작품들이 남아 우리 가슴에 풍기고 있다. 길이 갈 것이다.'



    정운 선생의 향내 머금은 작품들은 첫째로 연정의 아름다운 향기가 넘친다고 할까.

    '그대 그리움이 고요히 젖는 이 밤/한결 외로움도 보배냥 오붓하고/실실히 푸는 그 사연 장지 밖에 듣는다'.

    이것은 '비'의 전문이다. 딸은 멀리 떨어져 있고 혼자 지키는 방안의 허적, 그리고 젖어내리는 밤비의 냉기 속에서 청춘의 타오르는 불꽃을 오로지 시조로써 달래야 했던 정운 선생.



    '오면 민망하고 아니 오면 서글프고/행여나 그 음성 귀 기우려 기다리며/때로는 종일을 두고 바라기도 하니라//정작 마주 앉으면 말은 도로 없어지고/서로 야윈 가슴 먼 窓만 바라다가/그대로 일어서 가면 하염없이 보내니라'


    이것은 첫 시조집 '청저집(靑苧集)'(54년)에 실렸던 작품('무제Ⅰ')으로, 경남 통영시에서 당시 교편을 잡고 있던 정운 선생이 청마 유치환과의 연정을 한창 싹틔우고 있을 무렵의 심경을 토로한 작품이다. 정운 선생은 40년대말~50년대말 통영에서 10여년간 머물렀고, 50년대말에 부산으로 옮겨 와서 67년초까지 부산에서 생활했다.



    정운 선생은 사랑에 대해선 퍽 용감하고 솔직한 분이었다. 정운과 청마의 사랑은 청마가 정운에게 준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란 책에 절절히 기록되어 있지만 뜨겁고 열렬했던 그들의 사랑은 찬탄할 만하다.



    애타는 심정을 시로 서로 화답하고 당신이 주신 시를 수 놓은 그 병풍 아래 누워야 잠이 들고 하루에 한 장씩의 편지를 주고 받아야만 진정이 되는 사랑은 참으로 아무나 하는 것이 아니다.



    정운 선생의 향내 머금은 작품 세계는 두번째로는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이라 할 수 있다.

    '사흘 안 끓여도 솥이 하마 녹슬었나/보리 누름철은 해도 어이 이리 길고/감꽃만 줍던 아이가 몰래 솥을 열어보네'.

    이것은 정운 선생의 대표작 중 하나인 '보리고개'다. 보릿고개의 절박한 삶을 이처럼 실감나게 표현한 작품은 일찍이 없었다.



    '눈이 오시는 날에 동작동 墓地를 걷는다/뜨겁게 목숨을 사뤄도 사무침은 돌로 섰네/山河도 고개를 숙여 이 絶叫를 듣는가'.


    이것은 '落花'의 일부이다. 여기서 보듯 정운 선생은 인간에 대한 연민과 사랑으로 세월을 보낸 시인이었다. 인간에 대해서만 아니고 풀 한 포기에도 사랑과 연민을 보냈다.



    필자가 고등학교 2학년이던 해 여름, 정운 선생 댁인 애일당(愛日堂,부산대 인근)을 찾았을 때 대문 앞에 달린 수세미가 옆집 것 보다 훨씬 크고 묵직하여 씨가 달라서 이렇게 된 것이냐고 물었더니 그게 아니라 거름을 듬뿍 주고 벌레 잡아주고 쓰다듬어 준 결과라고 하면서 비록 식물이라도 애정으로 대하면 애정으로 답한다고 일러주었다.



    정운 선생이 애일당을 떠나던 날 나는 사진사를 데리고 부산에서의 마지막 모습을 담았다. 선생은 당시 서울로 거처를 옮긴 것이다 .그게 1967년 이른 봄이었던 것 같다. 떠나던 그 날까지도 정운 선생은 뜰을 돌보고 계셨다. 마지막으로 뜰에서 자라는 것들에 애정의 손길을 주고 싶어했던 정운 선생의 그날 그 모습은 참으로 훌륭해 보였다.



    몇년이 흘러 애일당을 찾았더니 보료같던 금잔디밭, 수선화가 곱던 조그마한 연못, 사철 아름답게 피던 꽃들은 오간데 없어 저 옛 노래의 '황성옛터'를 실감나게 하였다.



    정운 선생이 가신지 25년의 세월이 흘렀다. 선생의 무덤은 경북 청도군 내호마을 선영 아래 오빠인 이호우 선생 곁에 있다. 정운 선생이 배출한 제자는 그리 많지 않지만 다들 괄목할만한 시인으로 성장하였다.



    전 부산문인협회 회장 김상훈(현 부산일보 사장)선배가 지난 96년 노고하여 금강공원 안에 정운 선생의 시비를 세웠는데 선생이 그리워질 땐 가끔 비 곁에 앉아 정운 선생이 내게 주신 도타운 애정을 한껏 느끼곤 한다.


    일찍이 혼자가 되어 오직 시를 쓰는 일과 딸 하나를 키우는 일에 전념하면서 어느 학교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던 이영도는 그 당시의 많은 남성 문우들로부터 선망을 받고 있던 상당한 미인이었습니다.



    이영도가 혼자의 몸으로, 그렇게 꿋꿋하게 그의 시와 딸을 지키면서 살 수있었던 것은 청마 유치환과의 애정에 크게 힘 입었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들의 사랑은 이영도로 하여금 외로움과 여러가지 고난을 이겨나갈 수 있도록 받쳐 주는 든든한 정신적 지주가 되었으며 청마를 향한 그리움은 그의 시를 시들지 않게 해준 충분한 자양이 되었습니다.



    청마의 편지는 마치 한 편의 산문시와도 같은 Lyricism 으로 가득차서 읽는 이로 하여금 가슴 뿌듯한 감동을 느끼게 해줍니다. 후에 <사랑하였으므로 행복하였네라>라는 책으로 묶여져, 그 수익은 이영도의 뜻에 따라 후진 양성을 위한 `시조시인상` 기금으로 희사된, 청마의 연애편지 중 한 편을 소개합니다.



    두 시인의 아름다운 사랑을 더듬으며 사랑이 가지고 있는 절절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다시 한번 새겨 보면서 사람간의 사랑이 언제까지나 아름답기를 기도합니다.

    사랑하는 정향!

    바람은 그칠 생각 없이 나의 밖에서 울고만 있습니다.

    나의 방 창문들을 와서 흔들곤 합니다.

    어쩌면 어두운 저 나무가, 바람이, 나의 마음 같기도 하고

    유리창을 와서 흔드는 이가 정향, 당신인가도 싶습니다.

    당신의 마음이리다.

    주께 애통히 간구하는 당신의 마음이 저렇게 정작 내게까지 와서는 들리는 것일 것입니다.



    나의 귀한 정향, 안타까운 정향!

    당신이 어찌하여 이 세상에 있습니까?

    나와 같은 세상에 있게 됩니까?

    울지 않는 하느님의 마련이십니까?

    정향! 고독하게도 입을 여민 정향!

    종시 들리지 않습니까?

    마음으로 마음으로 우시면서 귀로 들으시지 않으려고 눈 감고 계십니까?

    내가 미련합니까?

    미련하다 우십니까?

    지척 같으면서도 만리길입니까?

    끝내 만리길의 세상입니까?



    정향!

    차라리 아버지께서 당신을 사랑하는 이 죄값으로 사망에의 길로 불러 주셨으면 합니다.

    아예 당신과는 생각마저도 잡을 길 없는 세상으로



    -유치환으로부터 이영도 여사에게-


    http://s.dzboard.com.ne.kr/view.php?uid=18&Board_num=sibyuri2&boardnum=5

    ***

    중3 일학기 국어시간에 한국 문학의 흐름에 대한 공부를 한다.

    국어 선생님과 시간이 맞질 않아 나는 또 그 시간에 대타로 나섰다. 나의 대타 과목은 수학, 과학, 국어... 여건만 되면 의례대로 그냥 책 들고 선다. 이젠 이골이 났다. 전공 선생님들 보다는 다소 시험에 대한 현실감이 떨어지겠지만 감동을 끌어 내고자 하는 수업 방식에 아이들은 부담없어 좋아한다. 내가 좋아하는 시인들 이름과 작품이 쭈욱 열거되고... 청마 유치환 대목에 오니 과거 중학교 3학년 때의 흥분한 국어 선생님이 떠올라 픽 웃었다.
    청마와 정운 선생의 사랑을 불륜으로 매도하면서 서슬 퍼렇게 떨던 모습이...

    어린 나도 국어 선생님 가정에 뭔가 문제 있구나 생각할 정도였으니까...

    그 편파적 매도 땜에 그토록 아름다운 유치환님의 시를 쉽게 흘려 버렸었다. 뿐만아니다. 로크, 루소, 데카르트, 칸트, 헤겔 등의 사상가들을 사기꾼으로 매도하던 도덕 선생님 ... 피카소를 비롯한 화가들의 여성편력, 대표적인 음악가들의 신경쇠약 등 ...
    예술가의 작품을 이해하기 보다는 그들의 사생활에 대한 비난을 먼저 접해 그 위대한 예술 혼까지도 비하시켜 버리곤 했었다.

    이처럼 철학적, 예술적 빈곤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교사들에게서 일방적으로 심어진 그릇된 선입관을 없애는데는 오랜 세월이 걸렸다.

    사랑이 무언지를 깨닫고 난 지금에서야 비로서 작품을 통해 그들의 굴곡있는 삶마저 이해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매 순간마다 진실하다면 그 마음의 흐름과 예술의 표현도 진실 할 수 있음을 나는 먼저 알려 준다.

    작가의 삶에 대한 시비는 본인과 당사자들만이 가릴 수 있는 것...

    그리고 사랑을 비롯한 감정들은 일방적 욕심에서 묶어 둘 수 없다는 생각의 발로에서

    철저히 작품을 이해시키고 감상하도록 이끌어 본다. 그리고 부정적인 것 보다는 긍정적인 측면을 말해주어 우리 선조들의 세계를 이해 시키고자 한다.




    여기 지고지순의 사랑을 한 몸에 받았던 정운 이영도의 시조를 적어 본다.

    손바닥 마주치는 합환의 즐거움은 없을 지라도 마음으로 이미 사랑했음으로 행복했고

    그 추억만으로도 구슬같은 시조를 읊을 수 있었으니 두 시인은 이미 천하를 얻은 자이다.





    황혼에 서서 - 이 영도


    산(山)이여, 목메인 듯

    지긋이 숨죽이고

    바다를 굽어보는

    먼 침묵(沈默)은


    어쩌지 못할

    너 목숨의 아픈 견딤이랴

    너는 가고 애모(愛慕)는

    바다처럼 저무는데

    그 달래입 같은

    물결 같은 내 소리



    세월(歲月)은 덧이 없어도

    한결 같은 나의 정(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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