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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백제 의자왕과 흑치 상치
    자료 2011. 3. 26. 23:39

     

    http://blog.naver.com/kscmontana/110042607002

     

    비운의 장수 흑치상지(黑齒常之)와 백제부흥운동

     

     

    백제의 멸망을 초래한 황산벌 전투.

    660(의자왕 20) 마침내 사비성이 함락되고 백제는 멸망하였다.

     

    백제 무왕(武王)의 뒤를 이은 의자왕(義慈王)은 초기에 성충(成忠), 흥수(興首) 등의 문신(文臣)들과 무신(武臣)인 윤충(允忠), 계백(階伯) 등을 등용하여 선정을 베푸는 한편 신라의 대야성(大耶城)을 공격하여 김품석(金品釋)과 그의 처자를 죽이는 등 신라에 타격을 주기도 하였다. 그러나 643년에 고구려와 화친한 것을 계기로 당항성(黨項城)을 공략하는 등 지나친 외정과 흥수, 성충 등의 인재 배척이 민심을 이반시키면서 국정은 문란해졌다. 이 틈을 타고 나당(羅唐)연합군이 합세하여 신라는 김유신(金庾信), 김법민(金法敏:文武王), 품일(品日) 등이 거느린 5만 명의 군대로 탄현(炭峴)을 넘어 공격하여 백제의 장군 계백이 거느린 5,000명의 결사대를 황산벌에서 격파하고, 당나라의 소정방(蘇定方)과 신라의 김인문(金仁問)이 이끄는 13만 명의 당군은 백강(白江:錦江 하류)으로 침입, 백제군을 격파하니 660(의자왕 20) 마침내 사비성이 함락되고 백제는 31678년 만에 멸망하였다.

     

     

     

    629년에 태어난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백제가 멸망한 후, 백제에서 부흥운동을 벌이다 중국으로 항복해 무장으로서의 명성을 떨쳤으나 모반이라는 누명을 쓰고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인물이다. 그의 일생은 이처럼 간략히 소개해도 파란만장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망국(亡國)의 유장(遺將)으로서 한때는 적국이었던 당(唐)에서 대장군 직위까지 오른 흑치상지(黑齒常之) 였지만, 60년에 걸친 그의 일생은 663년을 이어왔던 그의 조국 백제의 역사처럼 험난하기 그지없었다. 일생의 전반 30년은 백제에서, 후반 30년은 중원 대륙에서 전쟁터를 누비며 살다가 한을 품고 세상을 떠난 비운의 무장(武將) 흑치상지(黑齒常之)의 발자취를 돌이켜보자.

     

     

     

    백제왕족 부여씨(扶餘氏)에서 흑치씨(黑齒氏)로

     

    흑치상지(黑齒常之)에 관한 기록은 비교적 많은 편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열전(列傳)에 그의 전기가 실려 있고, 중국측 사서인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 열전(列傳)에도 그의 전기가 들어 있으며, 본기(本紀)에도 그에 관한 기록이 있다. 삼국사기의 흑치상지전(黑齒常之傳)은 사실 이들 구당서와 신당서의 기록을 간추린 것이다. 그리고 지난 1929년 10월에 중국 낙양 북망산 그의 묘에서 출토된 묘지석 명문 등이 있다.

     

    당서(唐書)는 618년 당나라를 세운 '고조'부터 907년 나라를 잃은 '애제'에 이르기까지

    21(帝) 290년 간의 일을 기록한 정사(正史)다.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기에 앞서서 위의 기록들을 바탕으로 흑치상지(黑齒常之) 장군의 생김새와 사람됨, 그의 출신 내력부터 알아보자.


    삼국사기(三國史記) 흑치상지전(黑齒常之傳)의 첫머리는 이렇게 시작된다.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백제 서부 사람으로서 키가 7척이 넘었으며, 날래고 용감하며 지략이 있었다. 그는 백제의 달솔(達率)로서 풍달군(風達郡)의 장수를 겸했는데, 이는 당나라의 자사(刺史) 벼슬과 같다고 한다…”

    그의 키가 7척이 넘었다고 했으니 오늘의 기준으로 보아도 그는 키가 2미터에 이르는 당당한 체격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오늘의 한 자는 30.3센티미터이지만 옛날에 한 자는 28센티미터였다. 그러면 7척이라고 해도 196센티미터가 되는 셈이다.

    흑치상지 장군은 언제 어디에서 태어났을까? 신당서(新唐書) 본기(本紀)에 따르면 흑치상지가 감옥에서 죽은 것은 689년 10월이라고 했다.

     

    '무오(茂午)에 우무위대장군(右武衛大將軍) 흑치상지(黑齒常之)와 우응양장군(右鷹揚將軍) 조회절(趙懷節)을 죽였다.'고 했는데, 당시 그의 나이가 60세였다. 이를 기준으로 역산하면 그는 백제 무왕(武王) 재위 31년(서기 630년)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삼국사기(三國史記)나 구당서(舊唐書), 신당서(新唐書) 모두 그가 백제의 서부 사람이라고 했다. 백제는 전국을 동, 서, 남, 북 및 중방의 5방으로 나누어서 지배했는데, 이는 웅진성(熊津城)에서 사비성(泗批城)으로 천도한 이후 개편한 방, 군, 현 체제에 따른 것이다.

     

    그 이전 백제의 지방 행정구역은 22개 담로(擔魯)로 알려져 있다. 그리고 서부란 당시 백제의 도성 사비성을 전, 후, 좌, 우 및 중부 등 5부로 나누었는데, 흑치상지가 태어난 서부란 서방의 오기로 보인다.

    그러면 흑치상지(黑齒常之)의 성씨 흑치(黑齒)는 어떻게 비롯되었을까?

     

    의자왕(義慈王)의 후손들은 오늘날 부여(扶餘) 서씨(徐氏)로 남아 있다. 이는 백제 멸망 직후 당나라로 끌려갔던 의자왕의 셋째 아들 부여융(扶餘隆)으로 하여금 당(唐) 황제 고종(高宗)이 그의 성을 부여씨(扶餘氏)에서 서씨(徐氏)로 고쳐 당(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도독으로 보낸 이후 부여(扶餘) 서씨(徐氏)의 시조가 되었기 때문이다.

     

     

    (唐) 제3대 황제인 고종(高宗) 이치(李治)는

    (唐) 태종(太宗) 이세민(李世民)의 아들이다.

    (唐) 태종과 고종은 집요하게 고구려를 공격했으나 모두 실패한 전적이 있다.

     

     

    그런데 고구려의 명림답부(明臨答夫)와 을지문덕(乙支文德) 장군처럼 흑치상지의 후손들이 어떻게 되었는지는 종적이 묘연하다. 명림씨(明臨氏)와 을지씨(乙支氏), 흑치씨(黑齒氏)가  모두 없어졌기 때문이다.

     

    흑치상지묘지명(黑齒常之墓誌銘)은 이렇게 그의 가계(家係)에 관해 전해주고 있다.

    ’그 선조는 부여씨(扶餘氏)에서 나와 흑치(黑齒)에 붕해졌으므로 자손이 이를 따라 성씨(姓氏)로 삼았다..... 그 집안은 세세로 이어 달솔(達率)이 되었다. 달솔의 직책은 지금 병부상서(兵部尙書)와 같은데, 본국(백제)의 2품관이다. 증조부의 이름은 문대(文大)이고, 조부의 이름은 덕현(德顯)이며, 부친의 이름은 사차(沙次)로서 모두 관등이 달솔에 이르렀다.’

    어쨌든 흑치상지의 선조는 본래 백제의 왕족이었다. 부여씨(扶餘氏)는 백제의 왕성(王姓)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흑치상지의 증조부 이전 어느 선조가 흑치(黑齒)라는 지역에 분봉되어 이를 성씨로 삼았다.

     

    흑치(黑齒)라는 지역이 어딘가에 대해 그 동안 역사학계에서 논란이 많았는데, 여러 학자의 연구 결과 흑치는 백제의 22개 담로(擔魯) 가운데 하나로서 오늘의 동남아시아 지역, 특히 필리핀으로 비정하는 설이 우세하다. 그러면 백제가 일본열도나 중국 산동반도 뿐만 아니라 필리핀까지 식민지로 지배했단 말이냐고 의문을 품는 사람도 많을 것이다. 이에 관해서는 몇몇 역사적 기록에 따라 그렇다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일찍이 최치원(崔致遠)이 "고구려와 백제의 전성기에는 강한 군사가 백만이나 되어 남쪽으로는 오월(吳越)을 침범했다."고 말했고,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도 "백제가 삼국 가운데 가장 강성했다."고 말했다.

     

    여기에서 오월(吳越)은 중국 남부 양자강 하구를 가리킨다. 또 송서(宋書)에 따르면 "백제는 요서(遼西)를 경락했는데, 백제가 다스린 곳은 진평군(晉平郡), 진평현(晉平縣)"이라 했고, 양서(梁書)에도 "백제 또한 요서와 진평 2군의 땅을 차지했는데, 백제군(百濟郡)을 두었다."고 했다. 백제는 또 탐라를 기점으로 하는 원양항로를 개척하여 대만해협과 유구(琉球, 오키나와)를 거쳐 태국, 필리핀 등 동남아시아 지역과 인도까지 진출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또 양서(梁書) 백제전(百濟傳)에 따르면 "읍(邑)을 담로라고 하는데, 중국의 군현(郡縣)과 같다. 그 나라에는 22개 담로가 있는데, 모두 자제 종족을 그곳에 나누어 거주시킨다."고 했다. 이는 흑치 지역에 분봉된 흑치상지의 선조가 본래 백제 왕족이라는 사실을 반증하는 것이다.

     

     

    의자왕(義慈王)이 일본에 보낸 바둑판과 바둑알.

    강성한 백제의 해외 담로(擔魯)의 역사가 담겨있다.

     

    일본왕실의 보물창고인 정창원(正倉院)에는 남부여(백제)의 의자왕이 보낸 바둑판과 바둑알, 바둑통이 보관되어 있다. 바둑판의 정식명칭은 ‘목화자단기국(木畵紫檀碁局)’이며 바둑통의 정식 명칭은 ‘은평탈합자’다. 그런데 이 유물들을 분석해보면 그 안에 백제가해외 담로를 두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증거가 나온다. 먼저 목화자단기국(木畵紫檀碁局)을 보면, 자단이라는 나무에 상아를 정교하게박아서 만들었는데, 두 재료 다 백제(남부여) 본국에서는 나지 않는 것들이다. 자단나무는 바라트(인도) 남부나 스리랑카에서자라고, 상아는 코끼리가 있는 바라트나 실론 섬(스리랑카)에서만 얻을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백제가 이들 지역에 담로(해외식민지이자 무역기지)를 두었기 때문에 쉽게 이러한 재료를 구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또한 바둑판에 낙타가 새겨진 것이나 은평탈합자에 코끼리가 새겨진 것도 백제가 해외 무역으로 이런 동물들을 손에 넣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면 쉽게 설명할 수 있다. (‘일본서기’에도 백제가 왜에 낙타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일본은 온갖 이유를 열거하며 이 바둑판이 백제의 유물임을 인정치 않으려 애쓰고 있지만 한국 측은 이 바둑판과 바둑알, 바둑통 등 일습이 백제 작품임을 증명해냈다. 무엇보다도 목화자단기국은 화점(花點)이 17개다. 17개의 화점은 한국 고유의 순장바둑에만 사용되는 것이다. 삼국시대에 바둑이 성행했던 증거는 많다. 중국 역사서인 신당서(新唐書) 고구려전에는 “바둑과 투호놀이를 좋아한다”는 기록이 있고, 후주서(後周書) 백제전에 “여러 놀이 중 바둑을 특히 숭상한다”고 적혀 있다. 신라의 박구는 바둑의 최고수로 당(唐) 황제의 바둑사범인 기대조(棋待詔)란 직책에 오르기도 했다. 그러나 고대의 바둑의 유물이 한국에는 없고 일본에만 존재한다는 사실은 아이러니다.

     

     

     

     

    이번에는 사서의 기록을 통해 나타난 흑치상지(黑齒常之)의 사람됨을 보자. 그의 묘지명(墓誌銘)은 이렇게 전한다.

    '어려서 처음 공부할 나이가 되었는데, 곧 춘추좌씨전(春秋左氏傳)과 반고(班固)의 한서(漢書)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를 읽고 탄식하여 말하기를, "좌구명(左丘明)이 부끄럽다고 했고 공자(孔子) 역시 부끄럽다고 했으니 진실로 나의 스승이다. 이 경지를 넘는다면 무엇이 부족하다고 하겠는가!" 라고 했다.'

    이는 흑치상지가 평생을 무장(武將)으로 보냈으면서도 어려서 부터 중국의 여러 고전과 역사서를 읽어 학문적 수양이 깊었다는 사실을 일러준다. 그리고 신당서(新唐書) 흑치상지전(黑齒常之傳)은 이런 일화를 소개하며 그가 대범하고 포용력이 넓은 인격자였음을 전해준다.

    '흑치상지는 아랫사람을 부리며 사랑이 있었다. 그가 타는 말이 군사들에게 매질을 당했는데, 어떤 사람이 그에게 죄를 묻기를 청하니 대답하기를, "어찌 개인의 말(馬)에 대한 일로 경솔하게 관병(官兵)을 때릴 수 있으랴."고 했다. 상을 받는 대로 부하들에게 나누어주고 남겨놓은 것이 없었다. 그가 죽게 되자 사람들이 모두 그의 억울함을 슬퍼했다.'

     

     

    ‘낙양고묘박물관(洛陽古墓博物館)’

     

    낙양(洛陽)의 북망산(北邙山)의 낙양고묘박물관(洛陽古墓博物館)은 총면적이 3만 평방미터로 지상과 지하로 나눠져 있으며 지상에는 전시실 등이 있고 지하에 전한(前漢)시대부터 북송(北宋) 때 까지의 웅대한 고묘(古墓) 25기가 자리잡고 있다. 그 중에서도 특히 벽화묘군이 가장 유명하다.

     

    낙양(洛陽) 북망산(北邙山) 일대에는 백제유민 흑치상지(黑齒常之)장군과 그의 아들 흑치준(黑齒俊), 백제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夫餘隆), 고구려 연개소문의 둘째와 셋째 아들인 남생(南生)과 남산(南産), 남생의 둘째 아들 헌성(獻誠), 연개소문의 고손자 비(毖) 등의 묘()가 있다. 낙양(洛陽, 뤄양)은 동주(東周)이후 당나라 즉천무후(則天武后) 때 까지 아홉 개 왕조의 수도였다.

     

     

    또한 묘지명(墓誌銘)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부군(府君)은 타고난 바람이 영민하고 의젓했으며 성품이 명달했다. 힘은 능히 관 같은 무거운 것을 들 수 있었지만 힘 있다고 자처하지 않았고, 지혜는 능히 적들을 막을 수 있었지만 지혜로써 스스로 알려지기를 원하지 않았다. 그래서 드러나지 않는 것으로써 썼지만 드러났고, 어리석음으로써 올바름을 길러나갔기 때문에 그때 행실이 산처럼 우뚝하게 서 있었고, 모두가 쳐다보는 명망이 있게 되었다.'

    '이에 군대에 들어가 수레를 밀며 변방에서 절개를 세우니 중상을 잘 하는 사람도 악을 더하지 못했고, 칭찬을 잘하는 사람이라도 아름다운 말을 더 이상 보탤 수 없었다.'

     

     

     

     

    인생을 뒤바꾼 백제의 멸망

     

    흑치상지(黑齒常之)가 성년이 될 무렵은 무왕(武王)이 재위 42년만에 죽고 그의 뒤를 이어 백제의 마지막 임금인 의자왕(義慈王)이 즉위한 지 9년째 되던 해였다. 삼국사기(三國史記) 백제본기(百濟本記)에 따르면 의자왕은 용감하고 담력과 결단력이 있었다고 했다. 또 무왕이 재위 33년째 되던 해에 그를 태자로 삼았는데 부모에게 효도하고 형제에게 우애가 있으므로 그때 사람들이 해동증자(海東曾子)라고 불렀다고 한다.

     

     

    해동증자(海東曾子)라 칭송받은 의자왕(義慈王).

    (사진출처, 다물넷)

     

     

    한 나라의 흥망성쇠는 필부(보통 남자)에게도 책임이 있다(天下興亡匹夫有責)'는 고염무의 말도 사실이긴 하지만 그 시대의 지배 계급이야말로 흥망의 일차적 책임자이다. 그런 점에서 의자왕이나 경순왕, 공양왕, 순종황제 모두가 역사에 책임이 무거운 인물들이다.

     

    낙화암과 삼천궁녀의 전설을 남긴 백제 멸망의 주인공 의자왕은 무왕의 아들로 형제간에 우애가 깊었고 부모에 효성이 지극해 해동증자의 칭호를 들었다. 집권 초기에는 국력이 부강해 신라를 제압했고, 성충, 흥수, 계백과 같은 충신이 있어 선정을 베풀었다. 다만 자식의 죽음으로 복수심에 불타던 김춘추와 김유신에 의해 이뤄진 나당연합군의 정복 전쟁에서 항복하고 말았다. 결국 재위 20년 만인 서기 660년 전쟁에서 패한 그는 중국으로 끌려가 그 해에 죽어 망국의 제후들이 묻히는 망산(芒山)에 매장됐다.

     

    요컨대 낙화암에서 삼천궁녀가 떨어져 죽었다는 것은 허구이다. 백제가 패망할 당시 수도인 부여에는 총 1만 가구가 살았으니 인구는 45000명 정도였으며, 2500명의 군대가 있었다. 2500명의 군대를 가졌던 도성에서 3000명의 궁녀를 먹여 살린다는 것이 당시의 농업 생산력이나 주거 공간을 감안할 때 사실상 불가능한 일이다. 전쟁에 패한 의자왕은 “주색에 빠져 황음무도(荒淫無道) 하였으며 무능했던 왕”으로 매도 당하는 수모를 지하에서 마저 겪고있는 것이다.

     

     

    의자왕은 즉위 이듬해인 642년 7월에 직접 군사를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여 40여 성을 빼앗았다. 또 그 여세를 몰아 그해 8월에는 윤충(允忠) 장군에게 군사 1만명을 주어 오늘의 경남 합천인 대야성을 공격하게 하여 함락시켰다.

    그런데 당시 대야성 성주는 뒷날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으로 즉위하는 김춘추(金春秋)의 사위 김품석(金品釋)이었다. 대야성이 함락되고 딸과 사위가 죽음을 당했다는 비보를 들은 김춘추는 그때부터 고구려로 당(唐)으로 쫓아다니며 목숨을 건 외교전(外交戰)을 펼치며 백제를 멸망시키고자 온갖 힘을 다 썼다.

     

     

     

    자식의 죽음으로 복수심에 불타는 김춘추.

     

     

    하지만 부왕인 무왕(武王)이 그랬듯이 신라에 대한 의자왕의 공격은 집요했다. 재위 7년(서기 647년) 10월에는 의직(義直)에게 기병 3천명을 주어 신라를 치게 했고, 그 이듬해에도 의직을 보내 신라의 10여 성(城)을 빼앗았으며, 재위 9년(서기 649년)에는 좌평(佐平) 은상(殷相)에게 군사 7천여 명을 주어 신라의 석토성 등 7개 성(城)을 빼앗게 했다.


     

    백제가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게 멸망당하던 660년에 흑치상지는 31세였다. 당시 백제 조정은 정권 핵심부의 분열상이 극에 달한 상태였다. 좌평 성충(成忠)은 의자왕의 실정을 충간하다가 투옥되었고, 좌평 흥수(興首)는 고마미지현(古馬彌知縣)으로 귀양 가 있었다. 반면 또 다른 좌평인 임자(任子)는 신라의 실력자 김유신(金庾信)과 밀통하고 있는 등, 한마디로 말해서 망국일로를 걷고 있었다.

     

     

    백제가 멸망하자 낙화암 바위에서 바다로 떨어지는 궁녀들.

    의자왕이 삼천궁녀를 거느리지 않았다는 것은 밝혀졌으나

    궁의 여인들이 능욕을 면하기 위해 자살을 선택했을 수는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신라와 당나라가 연합하여 백제정복군을 편성한 것이 서기 660년, 김유신이 신라의 정예군 5만명을 이끌고 탄현을 넘어 황산(黃山)벌에서 계백(階伯)의 백제군 결사대 5천명을 전멸시켰으며, 소정방(蘇定方)이 지휘하는 당나라 군사 13만명은 웅진강(熊津江) 어귀에서 의직(義直)이 거느린 백제군사 1만여명의 저항을 물리치고 곧바로 사비성(泗批城)으로 진격하여 7월에 의자왕의 항복을 받으니, 백제는 변변한 항전도 못하고 허무하게 역사의 뒷편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1300년 만에 밝혀진 의자왕 항복의 비밀 - ‘KBS TV, 역사추적’이 심층취재로 방영

     

    ‘KBS TV, 역사추적’이 20081220. 백제의 멸망을 불러온 의자왕(義慈王) 항복에 관한 비밀을 밝히는 멋진 프로그램을 방영했다. 여기서 밝힌 새로운 사실들을 간략하게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당시 사비성을 장악했던 당나라 군대는 사비성을 빼앗고 의자왕을 사로잡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빠르게 사비성에 당도할 목적으로 사비성 외곽의 모든 성들을 그냥 지나쳐 사비성으로 내달렸다. 당군은 곧바로 사비성을 공략하여 궁성을 장악했으나 의자왕은 사비성에 없었다.

     

    의자왕은 사비성 외곽의 네 성을 지키며 아직 굳건한 백제 병력으로 적이 차지한 사비성을 포위할 작전을 세웠다. 당시의 전력으로 볼 때 충분히 승산있는 전략이었다. 임진성은 흑치상지가, 옹진성은 예식장군이 수비대장을 맡고 있었는데 의자왕은 예식장군이 지휘하는 웅진(지금의 공주) 산성에 머물며 전략을 세우고 있었다.

     

    당군은 빠르게 사비성에 당도할 목적으로 말을 몰아 달렸기 때문에 군량을 비축하지 못했었다. 또한 사비성에 있던 식량창고는 전황 중에 모두 불탔다. 당군은 외곽의 포위 속에 굶주림을 경험해야 했으며 유일한 방책은 신라로부터 식량을 공급받는 것인데 백제로 들어오는 길목은 모두 백제군이 지키며 공급로를 차단했다. 실제로 식량을 구할 방도를 찾으러 사비성을 나왔던 일천명의 당군이 모두 전멸당했다는 기록도 있다.

     

    철옹성이라고 불렸던 지방 각성이 아직도 건재한 가운데 나당연합군에 대항할 전력이 충분했음에도 불구하고 의자왕의 느닷없는 항복으로 백제역사를 마감한 것에 대해서 그동안 사학계에서는 여러 의문을 가지고 있었다.

     

    이번에 새롭게 밝혀진 바에 의하면 웅진성의 예식장군이 의자왕을 사로잡아 당의 소정방에게 넘겼다는 것이다. 의자왕을 위협하고 사로잡으려 하자 의자왕은 격렬히 저항하다 자결을 시도했다고 한다. 단재 신채호 선생 ‘조선상고사’에도 백제 장수 모반으로 인해 의자왕항복하게 되었다는 기록이 있다. 단재선생의 저술에는 “옹진성 수비책임자 예식장군이 의자왕을 사로잡으려 하자 의자왕이 자결을 시도했으나 동맥이 잘라지지 않아 살아있는 왕을 예식장군이 데리고 당의 소정방에게 항복했다”고

    당의 역사서를 해석했다.

     

    당나라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는 의자왕 항복에 관련된 기술내용에는 예식장군의 이름이 먼저 나온다. 왕 보다 아랫사람인 예식장군의 이름을 유례없이 먼저 기록한다는 것은 예식장군이 항복을 주도한 인물임을 나타내는 것이다. 기술된 내용을 한글자 한글자 해석하면 예식장군이 의자왕을 데리고 나온 것으로 해석된다.

     

    其大將 ? 植又義慈來降(기대장예식우의자래항) - 구당서

    그 대장 예식이 의자왕을 거느리고 항복하게 하였다” (? 에 해당하는’예’字는 示변에 爾을 쓴 ‘예’다)

     

    (장) : 데리고 가다. 체포해 가다

    , 부하인 예식이 왕을 잡아서 투항했다는 의미이다. 부하의 쿠데타, 즉 하극상인 것이다.

     

     

     

     

    의자왕 항복에 관한 중국의 기록인 신당서 소정방전.

    ‘웅진성에서 그 장군 예식이 의자와 함께 항복하였다’

     

     

     

     

    의자왕이 예식장군의 반역으로 포박된 채 끌려나와 항복함에 임진성의 흑치상지도 이 때 항복했다고 보는 것이 마땅하다. 항복 후, 왕족 일가가 당나라에 끌려갈 때 흑치상지도 함께 끌려갔다. 이 과정에 대해 소정방 열전은 "그(의자왕) 대장(大將)인 예식이 또한 의자를 데리고 와서 항복하니 태자 륭(隆) 여러 성주(城主) 전원을 함께 (본국인 당으로) 보냈다"고 묘사했다.

     

    최근 중국 지린성에서 발간되는 역사잡지 ‘동북사지’ 최근호에 백제 출신 고위관리의 묘지석이 중국 시안(西安)에서 출토됐다는 내용의 논문이 실렸다. 지린성 김영관 박사는 시안(西安) 출토 묘지명(墓誌銘)의 주인공인 ‘예식진’이 백제 정벌전쟁 때 웅진으로 피신한 의자왕을 포로로 사로잡아 당군에 바친 ‘예식’ 장군과 동일 인물임을 가문 출신지 직위 활동기간 등을 통해 규명했다.

     

     

    의자왕을 사로잡아 당군에게 넘긴 웅진성 수비대장 예식(예식진)의 묘비명.

    묘비명의 주인공 예식진은 웅진성 수비대장 예식과 동일인물임이 밝혀졌다.

    (2008년 중국 시안(西安)에서 출토)

     

     

    백제 멸망 후, 훗날 당에서 대장군공덕비를 세워 칭송받은 백제출신 인물은 단 세사람인데,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扶餘隆)과 당에서 토번과의 전투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흑치상지(黑齒常之)장군, 그리고 예식장군(예식진으로 표기되어있음) 이렇게 세 사람이다. 중국에서 발견된 백제 출신 묘지명은 흑치상지와 부여융을 비롯한 5명이 있다.

     

    흑치상지(黑齒常之)장군과 부여융(扶餘隆)의 묘지명에는 그들이 세운 공적과 직책, 인물배경 등이 상세히 기록되어있는 반면, 예식진의 묘지명에는 그 어떠한 공적도 벼슬도 기록된 바 없이 그냥 백제웅천인, 좌평 집안이라는 것과 대당좌위위대장군(大唐左威衛大將軍) 으로만 적혀있는 것으로 볼 때 이는 예식이 순전히 백제의 왕을 사로잡아 당(唐)에 바친 공훈으로 추정한다.

     

     

    예식진(웅진성 수비대장 예식장군)의 묘지명 뚜껑 탁본.

     

     

    이번에 새로운 사실을 추적하여 밝힌 KBS는 역사학자들의 세부적인 연구가 뒤따라야 할 것이라는 토를 달았지만 진정으로 좋은 내용을 방영해주신 KBS에 큰 찬사를 보내며 감사를 표하고 싶다.

     

     

     

     

     

    백제부흥군 한때는 사비성을 탈환하기도

     

    망국 당시 풍달군장이던 흑치상지는 의자왕의 항복에 따라 자신의 세력을 이끌고 당군에 항복했다. 그런데 소정방이 늙은 의자왕을 가두고, 당나라 군사들이 무지막지하게 살인, 방화, 약탈 등 만행을 마구 저지르자 이에 분개하여 곧 항복한 것을 후회했다.
     
    그해 8월 2일 사비성에서는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의 전승축하연이 있었다. 그때 무열왕과 소정방이 당상에 높이 앉고, 의자왕과 왕자들은 당하에서 그들에게 술잔을 채워 올리게 하니 이를 본 백제 신료들의 비통한 통곡소리가 하늘에 울릴 정도였다. 흑치상지도 분명히 그 자리에서 그런 기막힌 광경을 목격했을 것이다. 그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사비성을 빠져나와 임존성으로 달려갔다. 그리고 부흥군 조직을 위해 백제의 유민들을 불러 모으니 불과 10일만에 무려 3만명이나 모여들었다는 것이다.

     

    이런 기록으로 미루어볼 때 흑치상지가 군장을 역임했다는 풍달군, 그리고 그의 출신지라는 서방은 현재 충남 예산군, 대흥면 예당저수기 곁의 대흥산성(大興山城)일 가능성이 높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대흥현(大興縣) 고적(古蹟) 조에도 이렇게 나온다.

     

     

    흑치상지(黑齒常之)가 군장을 역임했다는 풍달군으로 추정되는

    충남 예산군, 대흥면 예당저수기 곁의 대흥산성(大興山城) 유적.

     

     

    '임존성(任存城)은 곧 백제의 복신(福信)과 지수신(遲受信), 흑치상지(黑齒常之) 등이 유인궤(劉仁軌)에게 대적하던 곳으로 지금 현의 서쪽 13리에 옛 석성이 있는데, 둘레가 5천 1백 94척이고, 성안에 우물 세곳이 있다.'

    흑치상지는 임존성을 거점으로 백제 부흥군을 모집하여 당군, 신라군과 맞서 싸우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 해 8월, 임존성을 공격해온 신라군을 격퇴시켜 첫 승리를 거두었다.

    그런데 삼국사기(三國史記)에는 백제 부흥군의 중요한 지도자가 복신(福信)과 도침(道琛)으로 나온다.

    복신(福信)은 무왕(武王)의 조카요, 의자왕(義慈王)의 사촌으로 알려졌는데, 무왕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日本書紀)에는 그의 성(姓)이 백제 왕성인 부여씨(扶餘氏)가 아니라 귀실씨(鬼室氏)로 나오니 어쩌면 그도 흑치상지의 가문과 마찬가지로 부여씨에서 분파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는 627년에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된 적도 있었는데, 백제 망국시 직급은 16관등 중 5위인 한솔(扞率)이었다. 그는 백제 부흥군을 일으킨 뒤 스스로 상잠장군(霜岑將軍)이라고 일컬었다.

    도침(道琛)은 오늘날의 전북 부안지방 출신의 승려로 현재 부안군 상서면 개암사 뒷산으로 비정되는 주류성(周留城)을 거점으로 백제 부흥군을 일으켜 기세를 떨쳤는데, 아마도 그의 군사들은 여러 정황상 승군이 주력군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또한 그는 영군장군(領軍將軍)이라고 자칭했다.

     

     

    개암사. 뒷산이 주류성(周留城).

     

    주류성(周留城)은 원효대사가 중건한 개암사 뒷산(전북 부안군 상서면)으로 추정한다. 멀리 정상부에 울금바위가 보인다. 울금바위에는 세 개의 굴실이 있는데 그 중 하나는 원효굴이다. 원효대사가 주류성에 온 까닭은 나라를 잃은 백제 유민들을 다독이기 위해서 였다.

     

     

     

    의자왕(義慈王)이 항복한 지 2개월 뒤인 660년 9월 23일에 이들 백제 부흥군은 갈수록 군세가 커지고 합류하는 성도 30여개로 늘어나 큰 세력을 형성하게 되자 당군과 신라군이 지키고 있는 사비성에 대한 공격을 개시해 도성 외곽의 목책을 부수고 군량을 탈취하는 등 곧 사비성을 함락시킬 듯 기세를 떨쳤다. 복신은 또 좌평 귀지(貴智)에게 생포한 당군 포로 100명을 딸려 왜국으로 보내며 지원군을 요청하는 한편, 왜국에 머물고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扶餘豊)을 새로운 임금으로 맞기 위해 본국으로 보내주기를 요청했다.

    그러나 10월 30일에 벌어진 전투에서 부흥군은 신라군에게 패배해 사비성 남쪽을 포위했던 군사들이 퇴각하고, 이어서 11월 5일 벌어진 전투에서도 백마강 건너 왕흥사잠성(王興寺岑城)에 주둔했던 부흥군이 패배함으로써 사기가 급격히 떨어지고 말았다.

    신라는 항복한 백제의 좌평 충상(忠常)과 상영(常永) 및 달솔 자간(自簡)에게 제7관등인 일길찬(一吉飡) 벼슬을 내리고 모두 백제의 고토 각지를 다스리는 총관직에 임명했다. 또 은솔 무수(武守)에게는 제10관등은 대내마(大奈麻) 벼슬에 대감직을, 은솔 인수(仁守)에게도 대내마 벼슬에 제감직을 주어 백제 유민들을 무마하도록 했다.

    이듬해인 661년 2월에 복신과 도침은 전열을 정비하여 사비성 공격에 나섰으나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게 배하여 임존성으로 퇴각했다. 당군은 그 틈을 타 점령군사령부인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수비하기 어려운 사비성에서 웅진성으로 옮겼다.

     

     

     

     

    내분으로 자멸한 백제부흥군

     

    일본에 있던 의자왕(義慈王)의 아들 부여풍(扶餘豊)이 귀국한 것은 그 이듬해인 662년 5월이었다. 의자왕의 서자 수십명 가운데 한명이라는 설도 있는 부여풍이 왜국으로 건너간 것은 흑치상지가 태어날 무렵이던 631년이니 30년만의 귀국이었다.

     

    부흥군은 부여풍(扶餘豊)을 새로운 백제 국왕으로 옹립하고 항전을 계속했다. 그러나 그 해 7월에 연합군에게 대패하고, 12월에는 부흥군의 수도나 마찬가지인 주류성에서 오늘의 전북 김제로 비정되는 벽성으로 천도했다. 그런데 백제 부흥군은 그 이후 지도층 안에서 내분이 일어나 자멸의 내리막길로 굴러 떨어지고 만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복신이 도침을 죽이고 그의 직할부대까지 합쳐 부흥군의 최강자가 되니 부여풍이 그의 위세에 감히 맞설 수 없어 제사나 주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이듬해인 663년에 복신은 조카인 부여풍에게 붙잡혀 피살당했다.

     

     

    주류성(周留城) 복신(福信) 굴.

     

    백제부흥군을 지휘했던 복신(福信)이 살았던 굴로

    주류성 ‘부안설’의 가장 명확한 증거가 되는 공간이다.

     (사진은 ⓒ 전라도닷컴  김태성 기자)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의 조선상고사(朝鮮上古史)에는 부흥군의 내분은 복신(福信)과 초기에 부흥군을 일으켰던 부여자진(扶餘自進) 사이의 알력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부여자진이 당장(唐將) 유인궤(劉仁軌)와 밀통한 사실을 복신의 심복인 사수원(沙首原)이 알고 이를 복신에게 보고하여 자진(扶餘自進)은 복신에게 죽임을 당했다. 이어서 신라군을 대파한 복신(福信)이 여세를 몰아 도침(道琛)까지 죽이고 부흥군의 주도권을 장악하니 불안해진 부여풍(扶餘豊)이 복신과 갈등을 빚다가 마침내 복신(福信)을 잡아 죽였다는 것이다.

     

    663년 6월, 복신을 죽인 부여풍(扶餘豊)은 왜국과 고구려에 구원병을 요청했고, 왜국이 이에 호응하여 군선 1천여척에 군사 2만 7천명을 보냈다. 하지만 8월 28일에 벌어진 백강전투(白江戰鬪)에서 왜군은 당나라 수군에게 군선 4백여척이 불타고 군사들이 전멸되는 참패를 당했다.

     

     

    백강 전투(白江戰鬪, ‘白村江の戦い’).

     

    백강 전투(白江戰鬪, ‘白村江の戦い’)는 663년 백제부흥군을 지원하기위해 일본이 보낸 원정군이 연합금강 하구에서 나당연합군(당나라와 신라군)과 싸운 전투다. 663년 의자왕(義慈王)의 아들 부여풍(扶餘豊)이 도움을 요청하자 일본은 백제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군선 1천여척에 군사 27천명을 보냈다. 하지만 828일에 벌어진 백강전투(白江戰鬪)에서 왜군은 당(唐)나라 수군(水軍)에게 군선 4백여척이 불타고 군사들이 전멸되는 참패를 당했다.

     

     

    이 결정적 전투의 패배로 부흥군의 수뇌인 왕자 부여충승(扶餘忠勝)과 부여충지(扶餘忠志)는 당군에게 항복하고, 부여풍은 고구려로, 그의 아우 부여용(扶餘勇)은 왜국으로 망명하고 말았다. 이어서 9월 7일에는 주류성이 함락되어 결국 백제 부흥운동은 종막을 고했다.


     

    그러면 흑치상지는 어떻게 하고 있었을까? 백제의 복국전쟁(復國戰爭)이 이처럼 허무하게 끝나자 그는 참으로 심각한 고민에 바졌을 것이다. 상세한 사정은 알 수 없고, 다만 분명한 것은 그가 이 무렵에 당군에게 항복했다는 사실이다.


    삼국사기(三國史記) 흑치상지전(黑齒常之傳)에 그의 항복에 관한 정황이 기록되어있다.

    ’…소정방(蘇定方)이 백제를 평정했을 때에 풍달군(風達郡)의 장수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부하와 함께 항복했다가 정방이 늙은 국왕을 가두고 군사를 놓아 함부로 노략질하매 상지가 성을 내어 좌우 추장 10여명을 데리고 탈출했다. 그리하여 도망쳤던 백제 군사들을 모아 임존성(任存城)으로 가서 굳게 지키니 열흘 안팎에 상지에게 모여든 자가 3만명 이었다. 정방이 군사를 정비하여 그를 쳤으나 이기지 못했고, 상지는 마침내 2백여 성(城)을 회복했다. 용삭(龍朔) 연간에 당(唐) 고종(高宗)이 사신을 파견하여 상지를 불러 타이르매 그만 유인궤(劉仁軌)한테 가서 항복했다…’

    어쨌든 흑치상지가 항복한 것은 663년 10월에서 11월 사이였다. 그때 임존성은 백강구 전투 패배에도 불구하고 지수신(遲受信)이 부흥군을 이끌고 지키고 있었다. 그해 10월 21일 신라군이 임존성을 공격하다가 실패하여 퇴각하고, 당군이 공격에 나었다. 그런데 이 임존성을 함락시킨 장수가 다름 아닌 흑치상지와 그의 심복이었던 사타상여(沙咤相如)였다.

     

    임존성이 함락되자 지수신(遲受信)은 고구려로 달아나고, 이로써 백제 부흥운동은 완전히 막을 내리고 말았다. 전쟁이 끝나자 흑치상지는 부여융(扶餘隆)을 따라 당나라로 건너갔다가 그 이듬해인 664년 초에 당나라 괴뢰정권이 수립될 때 다시 부여융을 따라 백제로 돌아와 웅진성주를 맡는다.

     

    당나라가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삼아 문무대왕(文武大王)을 계림대도독으로, 백제 옛 땅은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로 삼아 부여융(扶餘隆)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했기 때문이다. 이는 형식상 신라와 옛 백제를 동등한 지위로 만들어 신라와 백제 유민 사이에 깊이 파인 감정의 골을 덮고 양국을 효과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당나라의 잔꾀였다.

     

     

    의자왕의 아들, 부여융(扶餘隆)의 묘지명(墓誌銘)  탁본.


    부여융(扶餘隆. 615~682)은 백제 의자왕(義慈王)의 셋째 아들로 백제 부흥운동이 종식된 뒤 백제 옛 땅에 설치된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 왕이었다. 묘지석은 1920년 중국 낙양(洛陽. 뤄양) 북망산(北邙山)에서 출토되어 현재는 하남성(河南省, 허난성) 개봉도서관(開封圖書館)에 소장 중이다. 정방형으로 가로 세로를 교차시켜 괘선을 그어 방안(方眼)을 만들고 그 안에 한 글자씩 새겼다. 26, 127자로서 모두 669. 전체는 ‘서(序)’와 ‘명(銘)’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내용 구성상 4단락이다. 1단에서는 이름과 字 출신지를 밝히고 2단은 품성과 생애를 칭송하며, 3단은 생애를 칭송하는 銘이고, 4단은 제액으로 당(唐)에서 받은 벼슬 이름을 적고 있다. (연합뉴스 김태식 제공)

     

     

    어쨌든 흑치상지는 웅진성주로 있다가 672년에는 충무장군행대방주장사(忠武將軍行帶方主長使)로 임명되어 한동안 오늘의 전남 나주, 함평 지방에 파견되었다가 다시 좌영장군(左營將軍) 겸 웅진도독부사마(熊津都督府司馬)라는 명목상의 벼승을 받았고, 그 이듬해에 신라의 강공으로 웅진도독부가 해체되자 다시 당나라로 건너갔다. 이후 흑치상지는 당나라 장수로서 새로운 인생을 살게 된다.

     

     

     

     

    흑치상지, 당나라 장수로 승승장구

     

    당나라 조정으로부터 좌영군(左領軍) 원외장군(員外將軍)의 벼슬을 받은 흑치상지(黑齒常之)는 49세 되던 678년에 중서령(中書令)이며 하원도경략대사(河源道經略大使)인 이경현(李敬賢), 공부상서(工部商書) 유심례(劉審禮)와 더불어 토번(吐蕃) 공략전(攻略戰)에 나선다. 오늘날의 티베트인 토번은 607년에 통합되어 유례없는 강성을 보여 돌궐(突厥)과 더불어 당(唐)의 서역진출을 심각하게 위협하는 세력이었다.

     

     

    토번국(吐蕃國)의 강성한 군대.

    토번(吐蕃)은 오늘날의 티베트(Tibet) 이다.


     

    먼저 유심례가 선봉부대를 이끌고 토번 공격에 나섰으나 이경현은 토번의 군사들이 밀려온다는 말을 듣고는 겁을 먹고 낭패하여 달아났다. 진격하던 유심례는 지원군이 이어지지 않았으므로 토번군의 반격을 받아 군사를 거의 잃고 간신히 목숨을 건져 적의 포위망에서 벗어나게 되었다.

     

    흑치상지(黑齒常之)는 그러한 혼한 속에서 침착함을 잃지 않고 활로를 트는 방법을 모색했다. 그는 날랜 군사 5백명을 선발하여 결사대를 조직하고 앞장서서 토번군 진지를 야습(夜襲)하여 적병 수백명을 참살하거나 포로로 삼았다. 이로써 이경현도 가까스로 선주에 도착할 수 있었다. 이 전투에서 흑치상지만이 홀로 전세를 역전시키는 산과 같은 무공(武功)을 세워 주목받았다.

     

    승전(勝戰) 소식을 들은 당황(唐皇) 고종(高宗)은 흑치상지의 수훈(首勳)에 감탄하며 그를 좌무위장군과 검교좌우림군에 발탁하고 금 5백냥과 비단 5백필을 상으로 내렸다. 흑치상지는 하원도경락부사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다시금 토번 정벌이 실행되었는데, 이경현의 군대가 양비천(良非川)에 주둔하고 있는 찬파(贊婆)와 소화귀(素和貴)가 거느린 토번 군사 3만명과 접전(接戰)을 벌였으나 대패하고 말았다. 그러나 흑치상지는 정예 기마병 3천명을 거느리고 토번 진영에 대한 기습공격을 감행하여 적병 2천여명을 참살하고 수만마리의 양과 말을 노획하는 전과를 올렸다. 찬파는 단기로 달아날 정도로 토번군의 완벽한 패배였다.

     

    고종은 패전한 이경현을 파직하는 대신 흑치상지를 하원도경락대사로 삼고 비단 4백필을 상으로 내렸다. 그러나 흑치상지는 당나라 황제에게서 하사받은 상품을 모두 부하들에게 나누어주고 자신은 단 한필도 집에 가져가지 않았다.

    흑치상지(黑齒常之) 장군의 승승장구(乘勝長驅)는 이어졌다. 681년에 토번의 추장 찬파가 변경을 침입하여 청해(淸海)에 흑치상지는 기병 1만을 거느리고 한달음에 덮쳐서 격파하였다. 흑치상지는 창을 잡고 말을 달리며 전장을 좌충우돌(左衝右突), 쓰러뜨린 적장만도 수십명에 이르렀으며 양이나 말과 같은 가축과 갑수(甲首)를 헤아릴 수도 없이 많이 노획하였다. 흑치상지의 승전(勝戰) 소식을 들은 고종은 조서(詔書)를 내려 그의 노고를 위로하고 전공(戰功)을 포상하여 좌응양위대장군, 연연도부대총관으로 승진시켰다.

     

     

    돌궐과의 전쟁.

     

     

    흑치상지는 684년에는 좌무위대장군, 검교좌우림군으로 승진되었고, 686년에는 돌궐의 침공을 격퇴시킨 공으로 연연도대총관으로 승진했다. 또 그 이듬해에도 황하퇴(黃花堆)에서 돌궐의 지도자인 쿠틀룩 합한과 원진의 군대를 격파하여 연국공이란 작위와 식읍 3천호를 받고 우무위대장군 겸 신무도경락대사(神武道經略大使)로 임명되었다.

     

    흑치상지묘지명(黑齒常之墓誌銘)은 그의 빛나는 전공(戰功)을 이렇게 찬양했다.

    '오랑캐의 난리가 깨끗이 평정되니 변방의 말이 살찌게 되었고, 중국이 태평성대(太平聖代)가 되니 오랑캐가 없어지게 되었다. 군사를 내니 칭송이 있고, 개선하여 돌아오니 노래가 생겼다.'

     

     

     


     

    억울한 죽음으로 생을 마감한 흑치상지

     

    하지만 검은 함정이 그의 앞에 숨어 있을 줄을 어찌 알았으랴. 때는 그의 나이 58세가 되던 687년 당나라는 고종의 황후였던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지배하고 있었고, 흑치상지(黑齒常之)는 회원군 경락대사의 관직에 있었다. 이때 좌감문위중랑장 찬보벽(贊甫碧)과 합동작전으로 돌궐(突厥) 정벌전(征伐戰)을 펼쳤는데, 찬보벽이 전공을 독차지할 욕심으로 혼자 군사를 거느리고 적군을 공격하다가 전군이 전멸되는 참패를 당하는 일이 벌어졌다.

    결국 찬보벽은 처형되고, 흑치상지도 패전(敗戰)의 책임을 함께 질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우응양장군 조회절(趙檜節)의 모반사건에 연루되었다는 무고를 당해 감옥에 갇히고 말았다. 흑치상지를 무고한 주흥(周興)이란 자는 요즘 말로 치면 측천무후(則天武后)의 비밀경찰이었는데, 밀고자였을 뿐만 아니라 악랄한 고문자로도 악명을 떨치던 자였다.

     

    그렇게 해서 일세의 영웅 흑치상지(黑齒常之)는 끝내 옥중에서 죽음을 맞았으니 그대가 689년 10월 9일이라고 묘지명은 전한다. 당시 향년 60세였다.

    그런데 그의 죽음이 처형인지 자살인지 불분명하다. 묘지명에는 교수형을 당한 것으로 나오고, 구당서(舊唐書)와 신당서(新唐書)에는 스스로 목을 매 자살한 것으로 나오기 때문이다. 묘지명에는 그의 죽음을 두고 이렇게 썼다.

    '영욕은 반드시 있는 법이고, 죽고 사는 것은 운명이다. 진실로 돌아가는 데 함께 한다면 어찌 부인의 손에서 목숨을 마치랴.'

    이렇게 흑치상지(黑齒常之)가 누명을 쓰고 죽자 그의 사람됨을 아는 주위 사람 모두가 슬픔을 이기지 못했다. 흑치상지가 한을 품고 죽은 지 9년이 지난 698년 그의 장남 흑치준(黑齒俊)의 눈물겨운 신원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보아 그의 억울함이 밝혀지고 좌옥금위대장군 벼슬이 추증되었다.

     

     

    흑치상지(黑齒常之)의 사위 물부순(勿部珣) 장군과 둘째 딸 흑치(黑齒)부인 부부가

    중국 산시성(山西省)에 조성한 천룡산석굴(天龍山石窟).

     

     

     

     

    중국 산시성(山西省) 성도 타이위앤(太原) 남서쪽 36km 지점에 소재한 천룡산석굴(天龍山石窟) 중 제15호굴. 이 석굴은 흑치상지(黑齒常之)의 사위 물부순(勿部珣) 장군과 흑치상지의 둘째 딸인 흑치(黑齒)부인 부부가 돌아가신 임금과 친척들을 위해 707년에 조성한 석굴로 최근에 밝혀졌다. 이곳에서 출토된 공덕비로 파악한 '대당물부장군공덕기'(大唐物部將軍功德記)의 ‘물부장군’이란 인물과 한국고대사학계에서 지금까지 백제 혹은 고구려 유민으로 간주해오던 '순장군'(珣將軍)이 동일 인물임이 밝혀진 것이다. 순장군(珣將軍) 으로만 알고 있던 흑치상지(黑齒常之) 사위의 성씨가 ‘물부(勿部)’라는 것이 밝혀진 것은 처음이다. ‘물부(勿部)’는 고대 일본의 성씨(姓氏), 즉 모노노베씨(物部氏)를 지칭하는 것으로 사위 물부순(勿部珣)은 663년 나당연합군과 왜군 사이에 벌어진 백제부흥운동을 둘러싼 대전쟁인 백촌강(금강) 전투 등지에서 포로가 된 왜인(倭人)일 가능성이 많다고 한다. '대당물부장군공덕기(大唐物部將軍功德記)’는 순장군(珣將軍) 즉, 물부순(勿部珣) 장군의 공덕을 기록한 것이다. (연합뉴스/김태식)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이런 교서를 내렸다고 그의 묘지명은 전한다.

    '죽은 좌무위대장군(左武威大將軍) 검교좌우림위상주국(檢校左羽林衛上柱國) 연국공(燕國公) 흑치상지(黑齒常之)는 일찍이 어려서부터 지체있는 집안에서 태어나 교육을 받았고, 군무(軍務)를 많이 경험했다. 장수로서 군사일을 총괄하게 되어 비로소 공적을 널리 떨쳤다. 지난날에 뜬소문을 받아가지고 옥에 갇히게 되었는데, 은근한 분함을 머금고 목숨을 마쳤으나 의심받았던 죄는 분간이 되지 않았다. 근래에 조사해보니까 일찍이 모반했던 정황이 없었다. 생각해보건대 오로지 그러한 것은 아니었으므로 진실로 크게 한탄스럽다. 마땅히 원통함을 풀어 주어서 무덤에 가 있는 혼이라도 위로해주어야겠다. 그래서 총애하는 표시로 관작을 더해 고인을 빛내주고자 하여 좌욱금위대장군(左玉妗衛大將軍)에 추증하고 훈봉(勳封)을 옛날과 같이 하였다.'

     

     

    측천무후(則天武后)는 중국 역사상 최초이자 유일무이한 여황제로

    조정 대신들을 압도하는 강력한 지도력으로 권력을 행사했다.


     

    또 사후 10년째인 699년에는 측천무후(則天武后)가 흑치상지(黑齒常之)의 개장(改葬)을 허락하는 조칙을 내려 그의 묘는 낙양 북망산으로 이장되었다.

    흑치상지(黑齒常之) 장군의 죽음은 그의 후배인 고선지(高仙芝)의 죽음과 비슷한 점이 있다. 두사람 모두 각각 백제와 고구려 왕가의 후예로서 나라를 잃은 뒤 당(唐)나라 장수가 되고, 빛나는 전공(戰功)을 세워 무위(武威)를 크게 떨쳤건만, 끝내 무고를 당해 억울한 죽음을 당한 것이 그렇다.

     

     

    출처:

    http://kin.naver.com/open100/db_detail.php?d1id=11&dir_id=110101&eid=9FrUPq8wC2Ieu6+cHAf2Rl62NyQzqcCw&qb=yObEobvzwfY

    http://www.kbs.co.kr/1tv/sisa/tracehistory/vod/preview/index.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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