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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의 시대상과 성풍속 그리고 남존 여비 1부
    내가 쓰는 이야기 2014. 3. 18. 03:11

     

    <열하일기><허생전><호질><양반전> 등을 남긴 연암 박지원은 대단한 양반가의 사람이다.

    처음에는 관직에 관심을 두지 않다가, 청을 다녀온 후 현감, 군수등 관직에 오른다.

    그런데 재미있는 부분은 그런 대단한 양반이 양반전, 허생전, 호질 등 상당히 많은

    작품에서 양반들을 조롱하고, 천하에 몰염치한 인물들로 그리고 있다는 점이다.

     

    조선시대 양반계급 인구의 통계는 1910년의 전국 호구조사에서 확인이 되는데, 총 가구(家口) 수

     289만 4,777호 가운데 양반이 5만 4,217호로 전체 인구의 겨우 1.9%에 불과했다.

    그런데 조선의 사람들의 삶을 엿보려 하면, 많은 부분 양반 위주의 기록외에는 없다.

    평민과 노비들의 삶은 그냥 고단했으려니... 짐작할 뿐이다.

     

    조선은 단적으로 표현해서 주자학에 따른 관혼상제 (冠婚喪祭)의 나라였다.

    사단칠정[四端七情]의 논리에, 이기이원론[理氣二元論], 이기일원론[理氣一元論]으로

    나뉘어 자신만이 옳다고 싸움질하던 나라였다.

    관혼상제란

    관례는 상투를 틀고 머리에 관을 쓰는 성년이 되는 의식이고,,

    혼례는 결혼식에 관한 의례를 말하며,,

    상례는 장례식에 관한 의례를 말하며,,

    조상을 기리는 제례는 시제(時祭)·차례(茶禮)·묘제(墓祭) 등에 관한 예절이다.

     

    사단(四端)은 맹자의,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지단(仁之端):남을 불쌍히 여기는 마음은 인의 근본이며,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의지단(義之端):착하지 못함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의의 근본이며..

    사양지심(辭讓之心)은 예지단(禮之端),:겸손히 남에게 양보하는 마음은 예의 근본이며..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지지단(智之端):옳고 그름을 분별하는 것은 지의 시작이다,,

    이라는 인의예지의 형이상학적 마음이며,,

    칠정[七情]이란 예기에 나오는 사람이 갖고 있는 일곱 가지 감정,

    즉,, 희·노·애·구·애·오·욕(喜怒哀懼愛惡欲) 으로 희노애락 등의 원초적 마음인

    형이하학적 마음이라 할 수 있다...

     

    칠정은 짐승들조차도 가질 수 있는 원초적인 본성의 마음 상태(氣)이기에,,

    사람인 이상 도리와 이치에 맞는 사단의 이치(理)에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어차피 4단도 차원은 높지만 마음의 한부분이요, 칠정도 기본으로 갖고 있는 원초적 마음이니,,

    칠정의 마음이나 사단의 마음이나 마음이기는 같다는,,즉 理와 氣가 하나라는 것이 이기일원론이고,,

    칠정의 마음은 사단의 마음 상태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것이 이기이원론이다..

     

    사단칠정론(四端七情論)은 이황과 기대승으로 시작된 성리학 논쟁을 말한다.

    이마음이 저마음과 다른 것이다..아니다 같다..의 논쟁으로 4색 당파가 나뉘고

    이것이 조선 중후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싸움질 하던 주된 내용이다.

    우리 현대 철학자들은 이것이 정말 위대한 사상의 대립이고, 철학적 사상적 가치가

    대단하다고 말들 하지만,,그것은 학문을 하는 사람들의 얘기로 생각된다.

    앞서 말한대로 조선의 1.9% 정도만 양반인데,,

    그들 1.9%가 4패 정도로 나뉘어서 말싸움을 하며,,

    때때로는 서로간을  몰살시키고,,몰살당했고, 역적으로 몰리고 정권을 잡았다.

    백성들이 볼때는 “배부른 것들이 지랄한다~~” 하는 생각을 가졌으리라.

    현대도 마찬가지다..

    정말 배부른 것들이 서민들 생각 안하고, 맨날 지랄~~~들이다...

     

    나무를 보지 않고 숲을 보고 말하자면,,,

    백성이야 죽던 말던 뭔 상관이란 말인가...?

    권력을 잡으면 장땡이지....

    심심하면 외적은 쳐들어오는데,, 서민들이나 노비들은 전쟁으로 내몰고

    농사지어 먹을 것도 없는데 수탈은 하고,,

    그들 잘난 양반들은 총칼 싸움에는 직접 참여는 안하고 말로만 잘 싸우라 한다..

    현대에도 새로운 양반(?) 이란 놈들은 자식들은 이중국적 갖게 하고

    자신들도 이런저런 핑계로 군대를 안갔고,, 아들놈들도 안보내는데, 그시절은 오죽 했겠는가?

    조선 중기 이후는 양반이라면 모두 다 군역을 면제 받는다..

     

    세상밖에 다른 세상이 있다는 것을 모르니까 참고 사는 것이지,,

    에구~~~ 이놈의 세상,, 굶어 죽으나, 양반놈 등살에 죽으나,

    나라가 망해서 죽으나.. 이래저래 죽기 아니면 살기 아닌가..? 이런 생각 안가질까?

    일제시대에 일본에게 점령당했다고 자살한 양반들 숱하게 있었지만,,

    지긋지긋한 일본이나 청나라아닌 다른나라가 침법했다면 노비들 입장에선 만세 불렀을지도 모른다...

    세상이 바뀔 것 같다고.....어쩌면 살만한 세상이 열릴 것 같다고...

    개인의 행복을 보장 못하는 나라는 진정 사랑해야 하는 나라인가?

    얼마전 러시아로 귀화해서 올림픽 금메달을  러시아에 팡팡 안겨준 선수가 있다.

    그가 개인의 행복을 위해서 한 행동이 옳은 것인가? 그른 것인가?

    국제화된 요즈음은 국가관이 애매모호 하다..

    모든 사람들이 세상 밖에 다른 세상이 있음을 잘 아니 말이다.

     

     

    그렇다 하고,,, 조선은 직업적으로는 사농공상의 순서를 가진 나라이다.

    소설속 허생은 매점매석을 해서 큰 부자로 그려지는데,, 우리 역사상 최고의 부자는

    인삼독점 전매권을 가진 임상옥이 아닌가 한다.

    그당시 임상옥의 재산은 나라 살림의 반을 차지할 정도라니, 지금의 삼성등 대기업 보다

    더욱 큰 대상이었다.

    1832년 역관의 신분인 그를 순조는 군수로 임명하고, 이후 높은 관직을 주자 양반들이

    상인에게 높은 관직을 준다고 반대를 한다.

    지금으로 따지면,,, 대기업회장에게 저기 언저리 시골 군수자리 하나 주었다고 난리인 것이다..

    그런 임상옥 조차도 업신여긴 것이 조선의 사대부들의 체면치례인데,

    몰락한 양반가의 여인들은 농사도 못짓고, 남편이라곤 글만 읽으니 무슨 재주로 살 것인가?

    일반 평민들이나 노비의 여인들은 남편이나 자식들이 전쟁 등으로 죽어 나가기도 하니

    곤궁한 살림은 당연했고, 몰락한 양반가 여인들도 삶이 고되긴 마찬가지였을 것이다.

    돈이 되는 상업이 가장 천대 받으니,, 매일 삼식이 밥상 차려야 했던 여인들이 참 피곤했을 것이다..

    삼식이 밥상이던 삼순이 밥상이던 밥도 반찬도 없는데,, 3번씩 밥상을 차려야 하는 사람만이

    밥상 차릴 때의 어려움을 제대로 알 것이지만...(그시절은 두식이었으려나?... 암튼~~ㅎ)

     

    그런데,, 정말 남존여비라는 단어가 조선에 언제쯤 등장 했을까?

    고려시대의 여인들은 여자도 남자같이 무릎 꿇고 절을 하고,

    남편이 죽으면 아내가 호주가 되었고, 재산 상속등도 남녀차별이 없었다 한다.

    아들과 딸이 동등한 몫의 재산을 나누어 받았던 고려에서는 조상을 위한 제사도 동등하게 나누어 지냈다.

    그것을 윤행(輪行)이라고 한다.

    윤행이란 형제자매들이 돌아가면서 제사를 지낸다는 말로 장남이 조상제사를, 차남은

    부모제사를,, 차녀는 묘제사를 이런 식으로 나누어 지냈다는 것이다.

    그런 예법은 성리학이 극성을 부릴 때인 조선 중기인 16세기를 넘어서,,

    이율곡 같은 대선비 집안도 이런 윤행의 관행을 보여 주었고, 17세기초중반까지 이런

    관행이 이어졌다 한다.

    이후 장자 계승을 원칙으로 하고,,여성의 지위가 약해졌다 하는데,,

    17세기 중반 병자호란 45일만에 인조가 남한산성에서 청나라에 무릎을 꿇고,, 청나라가 철수하면서

    소현세자등을 볼모로 잡고, 양민 60만명 정도를 포로로 데려갔다는데, 이중 50만명이

    부녀자였다 한다.

    이후 그녀들 중 상당수는 고국에 돌아오는데,, 정절을 잃은 그녀들을 환향녀(還鄕女)

    라고 부르며,, 이후 화냥년으로 단어가 변모했으며,,, 그녀들 중 오랑캐의 아이를 임신한 여인들이

    낳은 아이를 호로자(胡虜子)라고 부르며 나중에 호로자식으로 변환해 불려졌다.

     

    남편에겐 이혼 당하고, 처녀들은 시집을 못갔으니 크게 사회문제가 되었는데,,

    자살하는 여인들이 많아지고 문제가 커지자.. 인조는 대동강 한강 금강, 낙동강, 영산강 등에서

    환향녀가 몸을 씻으면,, 잃어버린 정절을 되찾는 것(회절)으로 간주할 것이며,,

    이렇게 몸을 씻은 여인을 거부하는 집안은 크게 중벌로 다스린다.. 고 선포까지 하는 지경에 이른다..

    지금의 홍제천도 정절을 되찾게 된 회절천 중에 하나란다.

    구린 구석이 있으면 쉬쉬하면서 감추려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다

    이런 일이 있고나니 이때부터 양반들은 여인들의 집밖 출입도 자제 시키는 분위기이다.

    여성의 행동이 제한 당하고, 얼굴을 가리게 하고, 가마등으로 모습도 가리게 하니

    환향녀에 대한 분위기 때문에 여성의 지위가 속박되기 시작하고 조금 낮아지게 된 것 같다..

    남자들이 싸움질을 못해서 여인들이 당했는데,, 피박은 여인들이 쓴 것이다.

    여기서 남자들의 책임론이 나온다..

    싸움질도 잘 하지 못하면 남자도 아니다...ㅎ

    때때로 남자는 싸움질이라도 잘해야 한다... 하모~~~~ㅋ

    원시시대부터 가르쳐주었는데,, 몇천년간 습득을 했는데.......싸움질도 못하다니...ㅎ

    그런데 내가 보기엔 여성이 피박은 썼지만 여성의 지위가 아주 급변화 한 것 같지는 않다는 생각이다...

    여성의 지위가 급격히 낮아진 근거가 희박하다.

     

    왜냐하면 조선 초기 태종 이방원은 정권을 잡으면서 자신을 도왔던 민무구 등

    민씨 형제들을 토사구팽한다.

    민비의 혈족을 죽여서 외척의 정치 참여를 경계한 것인데,,

    이후 자신이 총대를 메고 세종의 장인조차 괜한 핑계로 역적으로 누명 씌워 죽여버리고 만다.

    세종이 편안히 왕권정치 하라는 지나친 외척에 대한 경계였다.

    태종이 그토록 심히 경계한 것을 보면 우리가 생각한 것보다는 고려때부터 조선초기 까지

    여성의 지위가 상당히 높았으리라.. 상상할 수 있다..

    그런데 조선의 역사를 보면,, 김해김씨, 안동권씨, 안동김씨,, 파평윤씨 등..

    우리가 알만한 대단한 양반 외척성씨들인데,, 조선 후기까지 이들의 권세는 계속된다..

    만약에 여성의 지위가 급하게 낮아졌다면, 외척들이 이토록 강세를 보일 수 있었을까?

    이것을 보면 여성의 지위가 그렇게 낮아지는 일은 없었던 듯하다...

    아뭏든 이상은 1.9%의 이야기이다.

     

    결국 조선 500년 역사에서 양반 남자들이 한 것은 외척에 의한 서로간에 세력 다툼과,,

    사단칠정론으로 발생한 사색 당파간의 싸움 딱 2가지 밖에 한 것이 없다..

    전쟁이 일어나도 무기력해서 무관들이나 백성들이 잘 싸워주기만 바랄는 것 밖에

    권력을 차지하려는 말싸움질과 백성을 괴롭힌 일 밖에는 한 일이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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