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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의 시대상과 성풍속 그리고 남존여비 2부
    내가 쓰는 이야기 2014. 3. 18. 03:30

    쌍화점이란 고려 충렬왕 때의 고려 가요가 있다..

    쌍화점( 만두가게)  에 만두를 사러 갔는데,,,만두가게 주인 회회아비(이슬람인) 도 손을 잡고,,

    불공 드리러 간 삼장사절의 주지와도 불륜을 갖는다는 내용의 노래이며 그런 얘기를 들으니

    '나도 자러 가야겠다'는 내용이 더해진다

     

    http://tvpot.daum.net/v/jwn-L7olA4M%24

    주진모라는 영화배우가 직접 부른 쌍화점 노래이다..

    영화로 만들어진 내용은  왕의 동성애에 관한 묘한 사랑이  그려졌다.

     

    세상이 아무리 일부일처가 자리잡았다고, 꼭 모두가 일부일처는 아니었음을 안다.

    힘있고, 돈 있는 자들은 일부다처다.. 신라 여왕들 같은 일처다부의 시간들도 많았다..

    그리고 고려왕족 중에도 그리고 조선까지 동성애도 많았음을 보여준다.

    암튼 그런 사회가 지속되는데,, 고려시대 어디에도 남녀가 차별 받았다는 기록은 거의 없다.

    남녀가 어느정도 동등한 위치였다면 말이얌,,, 성에 관해서도 어느정도 평등했을 것이다.

    고려는 불교 국가인데,,,

    여염집 여인네들이 절에 가면, 쌍화점 가사처럼 중들과의 불륜이 무지~~~무지~~~심했던 것 같다.

    그런데 이것을 불륜으로 봐야 하나,, 성이 어느정도 개방적이었다고 봐야 하나 나는 잘 모르겠다.

    모르겠다는 것은 내맘대로 봐도 된다는 것이니,, 둘 다~~~ 맞다..ㅎ

     

    그렇다면 말이얌~~~

    남자들이 다른 여인을 만난서 바람이란 것을 피운다고 치자..

    여성이 대등한 입장이라면,,열받은 여인인들 그렇게 바람 피지 말란 법이라도 있을까?

    물론 법이야 있었겠지만, 어느정도 용인되었을 지도 모른다..

    남녀의 성이 대등한 관계라면 남녀차별이라던가, 남존여비라는 생각은 없었을 것 같다..

     

    다시 14대왕 선조 시절 임진왜란,정유재란이 일어난  시절로 돌아가보자...

    구린 구석이 있으면 쉬쉬하면서 감추려는 것이 사람의 마음이라 했다.

    1636년 병자호란으로 청나라와의 전쟁은 겨우 45일 간 전쟁인데 이런 지경인데

    1592년에서 1598년 까지 일어난 임진왜란 그리고 정유재란은  근 8년간에 걸친 전쟁이다.

    그런데 일본놈들이 조용히 싸움질만 했겠는가?

    병자호란 당시의 환향녀정도에 비교가 안 될 정도 였으리라..

    논개같이 뜻을 품고 죽어간 이들 많았고,, 기타 여인들 자살도 많았으리라.

    정말 수많은 여성들이 유린 당했을 터인데,,, 왜 이때는 여성들의 지위가 떨어지지 않았을까?

    병자호란 겪으면서도 여성의 지위가 달라졌는데,,, ,정말 왜 이시절은 조용히 넘어 갔을까?

    물론 임진왜란 긴 기간동안 수많은 여인들이 강간을 당하여, 정절을 잃게 된다.

    전쟁이 끝나고, 수많은 남편들이 이혼을 허락하라고 선조에게 상소를 한다.

    선조는 여인들이 실절을 한 것은 자신들의 책임이 아니고 전쟁이 일으킨 현상이니,

    이혼을 허락할 수없다.. 선포를 했단다.

    그나마 조선 역사상 가장 멍청한 왕중에 한명이지만,  처리는 그럭저럭 잘했다..

    그러니, 남자들은 여인을 버리지는 못하고  첩을 두었다.. 고 기록은 남았다...

    그런데 이것은 양반의 기록이잖아~~~~~~

    어디 글도 모르는 평민이나 노비들이 상소를 올리겠는가 말이얌...

    양반가의 부녀자도 당했는데,, 평민들이나 노비들의 실상은 어찌했겠는가?

    역사는 감추고 싶겠지만,, 흔적은 아주 깊게 남았을 것이다.

     

    물론 임진란 이전에도 정말 많은 외침을 받았다..

    고려시대 몽고족에게도 정말 긴시간 짓밟혔고,,, 조선조에도 무지하게 전쟁에 시달렸다..

    얼마나 많은 여인들이 유린 당했을까? 생각해보면,, 답도 안나올 것이다.

    그런데 백성들은 이혼을 안하고 어찌 참고  살았느냐고..?

    참고 못참고가 어디 있었겠는가?

    그나마 그런 여인이라도 있으면 ... 정말 다행이라고 그냥 넘어갈 밖에.........

    어쩔 수 없이 그냥 성이 개방적이었다.. 고 보는 편이 나을 것 같다..

     

     

    16대왕 인조이후에 18대 현종 19대왕 숙종,, 21대영조(1776년까지 재위) 정조(1777~1800 재위) 등에

    이르르면  우리나라에는 많은 열녀문이  세워지기 시작한다.

    앞에 말한대로 병자호란 이후에 여인들의 바깥 출입을 금하기시작하고,, 장옷등을 걸치고. 가마를 타게하고

    행동의 범위를 가둔 것은 주자학 이념을 빙자한 구린 과거를 덮어보려는 남자들의 꼼수였다 하겠다..

    설혹 남편이 죽었다 하더라도 재혼을 금지하고,, 저 뒤쪽 사람출입 없는 곳에 여인들을 가두니..

    가문의영광일지는 몰라도,, 남아있는 과부에겐 고통의 시간이고 친정도 죽을 맛이었으리라.

    그런 가문의 영광을 장려하고, 여인들에게 더욱 큰 정절이라는 숙제를 남기기 위해서 아마도 열녀문을 세워주기 시작한 것 같다.

    왕이 뭐 알았겠는가?

    양반이란 작자들이 '열녀문이란 단어를 만들어 봤는데,,의미가 어떻겠습니까..? '하고 간하니,,

    '듣던 중 참한~~ 소리로고~~~' 하고 왕들은 답할 밖에.........

    왕께서도 그런 좋은 결정을 내려 주었네.... 하고  그런 본보기를 만들어 내고자 열을 올렸음직 하다.,,,

    그러니 여성의 우리안 갇힌 생활은 더욱 더 심해질 밖에...

    그에 따라서 남자가 바람 피워도,, 홧김에 여인이 바람피우는 것은 절대 용납되지 않는 시대는

    그때부터 형성이 되었음직 하다.

     

    그런데 왜 하필 인조 이후에 그렇게 여인들을 단속하게 되었느냐고.....?

    숙종, 영조, 정조 등은 우리 역사에 큰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황금 시기가 되었다.,

    한마디로 조금 먹고 살만 하니까,,, 과거에 치욕스러웠던 일들이 앞으로는 없으면 한다..

    하면서 우선 여인들의 품행 단속부터 하자.. 해서 일어난 일같다.

    18대 현종과 19대 숙종조에 등장한 송시열..

    조선을 ‘송시열의 나라‘ 라고 까지 했을 정도의 거목인데,,송시열(1607~1689)은 조선을  완전히

    뿌리째 유교의 나라로 만든 장본인이다.

    그는 우리나라 학자 중 유일하게‘자(字)’를 붙여서 송자라고 불린 유일한 인물이다.

    그의 업적에 대해서는 반대의 입장도 너무나 큰 인물이기도 하다..

    그런 인물이 등장 했으니,, 이렇게 여인들을 가두는 세상이 될 수 밖에.......

    여인들을 열녀문등으로 속박을 하고,,시집 귀신도 만들기 시작하였으니,, 여인들의 본가에 대한 상속문제도

    자연히 제한을 두게 되었으니,,,여인들의 행동의 범위가 위축되었음은 자명하다...

    그렇다고 이것도 진정한 남존여비의 시작은 아니었다 본다...

     

     

    9대임금 성종(1480년) 때에 어우동이라는 희대의 여인이 등장한다.

    굉장한 양반가의 여인인데,, 남편이 바람피우자 홧김에 바람 피운다.

    그바람이 엄청나서,,, 수십명의 사대부들이 연관이 된다..

    그이전에도 세종 때에 감동이란 여인도 어우동 찜져 먹을 만큼 수십명의 사대부들과 놀아난다.

    어우동은 처형되었지만, 감동은 처형되지도 않았다..

    쌍화점에서 보듯이,, 고려말은 분명 성이 문란한,, 아니 다소 개방적인 시기였음을 엿본다.

    아무리 주자학을 기본으로 삼아도,,, 조선조 초 중기까지 어느정도 성이 개방화 된 듯 싶다.

    세종대에 세자비조차도 동성연애를 하고 ,,, 조선의 소문난 자유부인인 감동이나 어우동의 예에서 보듯이

    양반가도 성에 대해서 그렇게 빗장 걸지는 않은 듯 싶다.

    어쩌면 하도 많이 외침에 시달리다 보니,,이러지도저러지도 못하고 성에 대해 관대한 것 아닐까?.

    앞서 얘기한대로 백성들에겐 정조의 개념보다,, 사느냐 죽느냐의 문제가 더욱 컸을 것이다..

    전쟁에서의 강간 등에 대해서 묵인하고 싶어서의 묵인이 아니고, 할 수 없이 그러했을 것이란 이야기다.

    전쟁이 아니더라도,,평상시에는 양반이란 지위를 이용해서,, 평민의 여인들을  빼앗기도 하고

    노비들을 무수히 겁탈했을 것이니,,, 그시절 평민이나 보비로 사는 남자들은 눈감고 세상을 살 밖에......

    분명 어느 정도 성이 개방된 것이 아니라면,, 세상은 벌써 뒤집혔을 것이다....

    우리가 교육 받았을 때는,, 여인의 정절이 목숨보다 중요한 시절이라고 알았지만 그것이 아님이

    여러 군데서 드러난다...

    그것을 용납못하면,,세상을 바꾸는 싸움질을 해야 한다..

    그래서 일어난 것이 홍경래, 임꺽정,, 이야기속 홍길동 등등 민중의 반란이다..

     

     

    어린시절 백의민족이고,, 단일민족이라고 많은 교육을 받았지만,,

    우리의 피에는 몽골의 피도, 청나라 오랑캐의 피도, 일본 왜적의 피도 흐른다.

    부끄러운 역사일 수 있지만,,, 그냥 그것이 역사다..

    이 세상의 모든 민족의 역사는 다 이렇다... 본다...

    슬프고 욕된 과거는 과거지만,,

    덕분에 우리에겐  색다른 피가 많이 섞이니,,,유전적으로 세계에서 가장 뛰어난 민족 중에

    하나로 성장 한 것 같다..

    어떤 고난이 닥치더라도 살아내면,,, 분명 반전이 오며 복이 되는 날이 올 것이다...

    고난과 역경은 분명 최고의 스승이다...ㅎ

     

    그런데 재미있는 현상은 

    18세기 이후 영 정조 등의 시기에 조선 여성의 민족의상 "치마 저고리"에 변화가 생겼다.

    일본이 '조선은 이래서 미개인이다..' 하고 날조했다고도 하지만,, 복식사를 공부하는 사람들은

    짧은 저고리를 인정하는 부분이란다.

    여인들이 젖가슴을 내놓고 다닌 것이다.

    물론 노비라던가,, 백성들 사이에 유행했다는데,, 양반까지는 모르겠다....

    아니,,,?

    여염집 여인들은 장옷도 걸치고,, 가마도 타야 하는데,, 무슨 젖가슴을 드러내고 다녀......?

    짧은 저고리는 젊은 층에 유행하다가,,점점 여성들 사이에 인기를 모아 19세기엔 일상적인 옷으로

    자리 잡게 됐다는 내용이 나온다. 일제시대에도 분명히 입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 보수적인 유교사회에서 어떻게 그런 옷이 유행할 수 있었을까. 참 의문이긴 한데,

    김홍도나 신윤복의 풍속화에도 가슴을 드러낸 여인들 그림이 많이 등장 한다..

    외국에서는 17세기 프랑스에서도 여성들 사이에 가슴이 훤히 다 보이는 패션이 유행했다 한다...

    이것은 다분히 억눌려 살게 된 여인들 사이에서 '여자가 감히...' 에 대한 반발심으로 작용했을 수도 있고,,,

    아직까지도 평민들 속에는 성이 개방적인 상태여서 그럴 수도 있고,,

    먹을 것은 없어도 여성으로서의 미를 뽐내야 하는 여인들의 공주병적인 자세일 수도 있겠다..

    내 생각에는 성이 개방적이라거나 문란했다기 보다는 많은 외침과 양반들의 등살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상황이 많다보니,, 그냥 묵인하고 관대해질 수 밖에 없는 개방이라는 생각이다.

    분명 최소한 일제시대 바로 전까지는 그랬을 것 같다.

    신윤복의 풍속화에는 노골적인 남녀사이의 그림이 많은데,, 어느정도 정서상 용납되었기에

    그렸을 테고,, 완전한 남존여비, 완전히 갇힌 남녀의 성차별이라면 그리지 못했을 작품들일 것이다.

     

    한편,,사대부들은 여인을 집안 깊숙히 감추긴 했지만,, 축첩을 할 때에도 어느정도 허락을 받아야 했고,,

    임금조차 외척의 힘에 눌려 살았기에,, 부부대 부부,, 1대1의 게임에선 여성이 남자에게 무릎을 꿇은

    흔적은 없다.

    오히려,, 집안 모든 곳간 열쇠를 여인들이 관리 한 점..

    그것이 지금까지 내려와서 이시대에도 남자들은 여인들에게 월급봉투째 바친다..

    세상에 이렇게 자신이 일한 것을 송두리째 바치는 자상한(?) 남편들은 우리나라만 있단다..ㅎ

    우리나라 여인들의 힘을 살려준 구석이다..~~~~~~ㅎㅎ

    아니 어쩌면 먹을 것 없어도 알아서 상차림하라는 책임전가 인지도 모르겠다..

     

    이런 많은 부분을 살펴 보면,,,

    남존여비는 정말 거의 잔존하지 않았다고 ...내 눈에는 보인다..

    특히나 98%에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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