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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의시대상과 성풍속 그리고 남존여비.. 3부
    내가 쓰는 이야기 2014. 3. 18. 19:30

     

    신과 인간을 이어주는 영매자인 무당은 산신, 지신, 장군신 등을 섬긴다.

    그런데 장군신으로 모시는 신들 중에는 김유신, 최영, 임경업 단 3분만이

    모셔진다 한다..

    간혹 사당으로는 남이 사당이 있기는 하다.

    뭔가 이상치 않은가?

    이땅의 최고의 무장은 이순신 장군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터인데,,

    무속인들이 특별히 이순신을 생략한 것은 정말 이상타..

    당나라와 신경전을 벌였던 신라 김유신, 명을 정벌하자 했던 고려 최영을 거쳐서,,

    인조조 병자호란 당시 백마산성에서 청병을 두렵게 했던 임경업으로 장군신이 움직인다.

    한이 많게 죽음을 당한 분들을 장군신으로 모셨다면 최영, 임경업 두분은 이해가지만,

    김유신은 함께 함이 어울리지 않는다..

    정말 무속 신앙이 어떤 특별한 기준으로 이들을 장군신으로 모셨다면 공통분모는 하나다.

    세분 다 중국과 대항해서 싸우거나 싸우고자 노력했던 분이라는 것..

    일본과의 임진왜란 7년이 정말 힘겹고 무지막지한 사건이긴 하지만,,

    어쩌면 우리 정서상에는 중국에 의한 1000년 이상의 심심찮은 침략이

    왜적의 침입보다도 더욱 못견디게 싫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이런 무속 신앙이 생기진 않았을까? 생각해본다..

     

    한편으론 이런 임진란 선조조와 광해군 시절에 우리에게 잘 알려진 의성 허준이 등장한다.

    동의보감을 저술 하고 먹고 살기 어려운 백성들에게 인술을 베푸는 가운데,,

    돈없이도 쉽게 구할 수 있는 약초들로 처방을 한다.

    물론 오랜시간 전해 내려오는 조상들의 지혜를 통해서 일반 백성들은 풀뿌리 약초라도

    캐어먹었을 것이다.

    여인들은 먹을 것이 없었을 것이지만 집안 살림을 하는 입장에선 삼식이 밥상을 차려야

    했기에,, 아마도 나물 같은 먹을거리를 잘 구별할 수 있어야 했을 것이다.

     

    땅에선 네다리 가진 것 중에 책상 빼고 다 먹고, 하늘에선 날아다니는 것 중에 비행기

    빼고는 다 먹는 다는 중국 광동성의 요리 문화가 있다 한다.

    그런 대단한 광동 요리이지만,, 우리의 산나물 먹거리는 그들조차 모르고 먹지도 않는다.

    산나물 유명한 곳을 가면 약 30가지 정도의 산나물 정식이 차려진다.

    그런 산나물 아니더라도, 민들레 씀바귀는 물론 냉이,, 달래, 토란대,,

    그리고 화살나무 어린잎도 먹기도 하고,, 지역적으로 구기자 어린잎도 먹는다.

    언젠가 청양에서 구기자 어린잎을 나물로 먹을 기회가 있었는데,, 나물 좋아하는

    내 입장에선 구기자나물이 다섯손가락 안에는 든다고 꼽아 본다.

    구기자 어린잎 같은 것은 그지역 사람들 아니면 먹을 기회는 없을 것이다.

    그런 나물들이 우리산하에 얼마나 많은가...

    골이 깊으면 뫼가 높다고,, 먹을 것이 없으니까 우리의 나물 문화가 이렇게 발달

    한 것 같고 사찰 음식이 대접 받는 시절이 왔다.

    슬픈 역사가 빚어낸,, 참 오묘한 건강한 먹을거리 문화 아닌가?

     

    지금 산에 가보면,, 사실 산나물은 거의 없다.

    산림녹화 정책을 잘 따르게 되어서,, 산에 산림이 무성하니 사실 산나물이 자라지 못한다.

    나무들이 너무 커서, 빛을 못 받아서 나물들이 못자라는 것이다.

    그런데 가끔 산불이 나면,, 산불나고 일이년 지나면 나물들이 자라기 시작한다..

    특히 고사리 취나물 등이 급속히 퍼진다..

    어쩔 수 없이 시장에 나오는 나물들은 거의 다 재배한 나물들이다.

     

    임진란 병자호란 등등 겪으면서,, 그리고 난방용으로 나무들을 무분별 베었을 테니,,

    산림이 엄청 황폐했을 것이다..

    그러니 다행히 나물들은 잘 자랐다.

    먹을 것은 부족했지만,, 나물들로 간신히 배는 채울 길은 찾았다.

    옛어른들은 말씀하신다.

    상수리꽃이 많이 피면 흉년이 온다고.....

    상수리곷이 많이 핀 올해는 흉년이니,, 도토리라도 주워서 먹으라는 하늘의 배려란다.

    하늘은 죽을 만큼 고통도 주지만, 분명 색다른 탈출구는 마련해준다.ㅋ

     

     

    이런 어려운 시절을 이겨낸 여인들이니,, 사실 음식도 대충 감으로 요리했을 것 같다.

    양념거리나 그런 것도 부족했을 것이니,, 산에 가서 요리하는 것처럼 대충 했을 밖에...

    감으로 하는 음식이라서 손맛이란 단어가 우리에겐 잘 어울리는 단어로 남겨진 듯 하다.,

    이렇게 재료가 부족해서 대충 감으로 요리하던 여인들의 솜씨(?)는

    이시대 들어서 특별한 곳에서 빛을 발하고 있다..

    우리의 여인들이 전 세계를 호령하는 스포츠 종목이 있다..

    어느정도는 감으로 하는 골프와 양궁이다..

    어려운 살림살이 감으로 요리하고 감으로 살아가다 보니,, 감이란 특별한 유전자를

    물려 받은 듯하다.

    앞으로는 대충 감으로 하는 컬링에서 두각을 나타낼 것으로 본다..확실할껴~~ㅎ

     

    하나만 더 살펴보자..

    정말 조선의 노비의 수는 얼마나 되었을까?

    조선 시대 전 인구의 약 30% 에서 최대 최대 50%에 이르렀던 시기도 있었다 한다.

    길거리에서 만나는 두명중 한명은 노비라는데,,,

    조선 시대 생산력의 대부분이 이러한 노비들로부터 나왔다는 것이다.,

    조선은 사대부의 나라가 아니고, 노비의 나라인 셈이다.

    노비들도 돈을 모으고 하다가,, 운이 좋으면 좋은 주인 양반이 어느날 면천시키는 경우도

    있었다는데,,면천이 곧 좋은 것은 아니었다 한다.

    노비를 벗어남이 어쩌면 좋은 직장을 잃어버리는 것과 마찬가지니 말이다..

    그렇다면 말이얌~~~

    어차피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 모두는 새로운 노비제도에 길들어짐 아닐까?

    직장을 짤리면,, 그날부터 먹구름 가득한 날의 시작이니 말이얌~ ㅎ

     

     

     

     

     

    여담의 이야기 하나 더~~~

    부북일기(赴北日記)라는 책이 있다. 1605년에는 아버지가, 1645년에는 아들이 각각 함경도에서

    국경 수비 근무를 하게 된 과정을 담은 일기가 바로 부북일기다.

    함경도 국경 수비부대의 생활상보다는 주인공들의 성생활이 더 눈길을 끈다.

    군관임에도 거의 3일에 한번씩 여자와 동침을 한다.

    주인공이 잠자리를 같이한 여자들은 여행중 임시로 잠을 자게 된 집의 여자 노비들,

    술집 여자(주탕), 기생 3자 중에 하나다.

    아들 박취문의 경우 1644년 12월10일 울산에서 출발하는데 다음날 좌수댁 노비와 동침,.

    12월15일 노비 분이와 동침, 12월16일에는 술집 여인 춘일이와 동침. 17일에도 술집 여자 옥춘이와,

    12월19일에도 여자 노비와 , 22일 술집 여인 향환과,,, 26일 술집여인 예현과 동침, 12월30일에는

    강릉 기생 연향과 동침,,, 다음해 1월2일에는 강릉 명기 건리개와 동침한다...

    그리고 한달간은 매독이 걸려서 한달뒤에야 성행위를 다시 한다.

    일기의 1/5정도는 여인과의 관계에 관한 기록이라 하니,, 아주 특이한 기록 유산이다..

    후손들에게 이책을 잘 보관하라고 당부까지 했다는데,,

    내용을 잘 모르니 후손들도 호기심으로 의뢰하여서 1970년 경 처음 세상에 알려졌다 하고..

    내용의 특별함에 1990년대에야 세상에 선 보였다 한다..

    어찌 보면 후손들로서는 참 창피한 기록을 알게 된 것이 허탈했겠지만,,,

    대충 그시절의 성문화에 대한 그러그런 세상사 기록 유산으로 생각 함이 편 할 것이다..

    물론 술집여인, 기생, 노비 들과의 상대에 관한 기록이긴 하지만,,

    성이 상당히 개방적이었기에,, 일기로 남겨도 된다고 생각해서 시도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현대의 시점에서 살펴보면 성에 많이 관대해진 현대의 정서로도 그런 내용을

    글로 남겨서 후손에게 잘 남기라고 할 사람은,, 아마도 없을 테니까.. 말이다..

     

    어려운 환경은 구복신앙으로 특별한 신을 만들어 내기도 하고,,

    새로운 음식문화를 만들기도 하는 것 같다.

    부북일기를 통해서도 성이 상당히 개방적이었던 조선중기의 어떤 하루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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