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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다이제스트 100자료 2016. 1. 29. 10:25
일본 고대사를 푸는 열쇠, 한반도
수수께끼의 초중기 고분 시대(4세기 ~ 7세기)
그때 세계는 280년 : 중국, 진의 통일
313년 : 로마, 크리스트교 공인일본이 언제 어떤 과정을 거쳐 통일국가가 되었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통일국가가 형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지는 4~5세기의 문헌 자료는 너무나 부족해 수수께끼로 덮여 있다. 다만 3세기 말부터 이곳저곳에 등장한 거대 고분만 덩그러니 남아 사라진 150년간의 일본 역사를 말하고 있을 뿐이다. 고분 시대라는 명칭은 이 시기에 거대한 고분이 많이 만들어졌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고분 건설은 민중을 동원하는 공사로, 수장 권력의 절대성을 보여 준다. 거대한 고분의 존재로 보아 일본의 통일국가는 4~5세기에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리고 야마토(大和)를 중심으로 한 기내(畿內, 나라, 교토, 오사카) 지방에 고분이 집중된 것으로 미루어, 야마토 지방(현 나라지역)을 중심으로 일본의 통일 정권이 형성되었으리라 여겨진다. 이를 야마토 정권이라 부른다.
일본이 고대국가를 형성하는 4, 5세기는 안개에 가려져 있다. 통일국가에 대한 견해도 각양각색이다. 진실은 하나일 터인데 논의가 무성한 것은 그만큼 자료의 부재로 일본의 통일국가 성립 시기를 규명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임나일본부설도 이 중의 하나다. 임나일본부설에 따르면 야마토 정권은 4세기 전반에 서부 일본을 통일했고, 4세기 말부터 200여 년간 한반도의 임나(가야) 지방을 지배했다. 고대에 일본이 한반도를 지배했다는 이 설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의 우리나라 지배를 역사적이고 운명적인 것으로 합리화하는 데 이용되었다. 현재 임나일본부설은 신빙성이 부족하여 일본인 연구자에게서도 외면당한다. 그러나 얼마 전까지도 버젓이 일본의 중고등학교 교과서에 실렸음은 물론이고, 서양의 일본사 개설에 거의 기재되어 있었다. 아직도 일본 내 우익을 비롯한 많은 일본인에게 이 설은 하나의 상(象)으로 존재한다.
4~5세기 일본의 상황을 분명하게 규명할 수는 없지만 고분의 매장 방식과 부장품의 성격에 의해 어느 정도 수수께끼를 풀 수 있다. 일본의 고분 시대는 3세기 말에서 4세기 초 시작되어 7세기까지의 약 400년간이다. 이 시기를 전기(4세기~4세기 말), 중기(4세기 말~5세기 말), 후기(5세기 말~7세기)의 세 시기로 나누는데, 특히 후기를 아스카 시대라고도 한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고분 문화도 한반도 사람의 이주로 형성되었다. 정확하게 어떤 집단이 언제 이주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한반도계 사람의 이주에 의해 일본의 4~5세기가 채워지고 야마토 정권이라는 통일 정권이 이룩되었다는 것만큼은 분명하다. 그 증거는 고분의 부장품에서 드러난다. 고분 시대 중기 이후의 고분에서 발굴되는 금은 · 금동 장신구, 말머리 가리개 등은 가야 고분에서 나온 것들과 그 형태와 제작 기법이 완전히 일치한다. 오사카 평야의 닌토쿠 천황릉(仁德 天皇陵, 다이센 고분)에서 나온 환두대도와 청동 거울은 백제 무령왕릉에서 출토된 것들과 아주 닮았다. 특히 청동 거울은 크기와 모양이 거의 비슷하여 일본 NHK 방송에서는 같은 거푸집에서 찍어낸 것이라 발표할 정도였다.
이외에도 그 유사성을 말해주는 증거는 무수히 많다. 한반도에서 일본 열도로 문화가 전파되었고, 문화만 전파된 것이 아니라 그 문화를 가진 사람이 이주했던 것이다. 가야와 백제 어느 왕의 후손이 바로 야마토 정권의 일본 왕이라고 단정할 수는 없지만 지배 계층 간에 불가분의 긴밀한 관계가 있었음을 추정케 한다.
한반도의 4세기는 고구려가 낙랑군을 멸망시키고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가 격렬한 항쟁 속에서 패권을 다투던 긴장의 세기였다. 물론 한반도에서 소수의 병력이나 주민들이 비조직적으로 진출하고, 전파 시기도 일정하지 않았다. 이러한 정치적 파고 앞에서 일본으로의 이주 행렬은 더욱 격렬해졌다고 추정할 수 있다. 특히 4세기 말과 5세기 말,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인구 이동이 있었을 것이다. 4세기 말에 고구려군이 신라의 지원을 받아 가야를 공격했고 이때 낙동강 유역에 살던 가야 유민이 일본으로 대거 이주했다고 추측된다. 5세기 말의 이주는 한성 백제의 멸망과 관련된 것이다.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 백제를 공격하여 개로왕을 죽이자 백제는 공주를 새 도읍으로 삼아 국가 재건을 노렸지만 왕위를 둘러싼 정쟁으로 정세가 불안했다. 이때 한성 함락으로 삶의 터전을 잃은 백제인과 권력 다툼에서 밀려난 세력이 일본으로의 이주를 택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일본 고분에서 가야 · 백제와의 강한 유사성이 보이는 것이다.
오사카 대학의 고하마 모토츠쿠(小浜基次) 교수는 일본의 모든 마을을 대상으로 1949년부터 1953년까지 5만 6,000여 명의 두개골 형태를 조사한 결과 현대 일본인의 원류가 아이누인(조몬인의 후예)과 한반도인이라는 사실을 밝혀냈다.
또한 일본 도쿄 대학의 하니하라 가즈오 교수는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7세기경 조몬인 직계 자손과 이주민 계통의 인구비가 1:9.6이라는 결론을 얻어냈다. 하니하라 교수의 추정치에 의하면 고분 시대의 일본, 특히 통일 국가의 본거지인 긴키 지방에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많은 이주자가 있었고 이들은 한반도인이라는 것이다. 하니하라는 고하마의 연구 결과를 더욱 과학적으로 입증하여 일본인은 단일 민족이 아니고 소수의 원주민과 다수의 한반도 이주민 혼혈로 이루어졌다는 사실을 발표하여 일본 학계에 큰 충격을 준 것이다. 더 나아가 미국 캘리포니아 대학의 제러드 다이아몬드 교수는 "일본인의 뿌리는 한국"이라고 단정했다.
이처럼 야요이 시대에 시작한 한반도인의 이주는 고분 시대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다. 신개척지를 찾아, 핍박을 피하고 자유를 얻기 위해, 혹은 국가적 후원 하에 일본으로의 이주는 계속되었다. 야요이 시대에는 한반도 남부에 살던 사람이 그 주류였고 이후에는 가야인, 백제인으로 대체되었다.
이주민은 일본 서부 지역을 중심으로 여기저기 집단을 이루어 정착했다. 긴키 지방 등 서부 일본의 주요 평야 지대에는 이주민 비율이 80~90%에 달할 정도였다. 이주민 집단 간의 경쟁도 치열했을 것이다. 부족 간 통합 과정을 거치면서 거대한 고분을 축조할 정도의 대수장으로 성장했다. 이들 대수장들이 대왕을 중심으로 연합 세력, 즉 야마토 정권을 형성했다. 여기서 대왕은 우리가 알고 있는 천황으로, 후일 대왕의 명칭이 천황으로 바뀌게 된다.
한반도를 빼놓고는 일본 고대사를 말할 수 없다. 그만큼 일본 고대사에서 한반도의 비중은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일본이 한반도의 영향으로 발전했다고 해서 오늘날의 관점으로 한국의 식민지였다거나 한국이 정복했던 것이라는 식으로 말할 수는 없다. 일본의 고대는 한반도인이 일본 열도라는 다른 환경 안에서 적응하며 만든 새로운 세계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귤이 바다를 건너면 탱자가 된다'는 말이 있다. 한반도인이 가져간 조선 문화는 일본 열도에 정착하면서 조선과는 아주 다른 성격의 사회와 문화가 되었다.- 출처
일본사 다이제스트 100, 정혜선, 2011. 12. 30., 가람기획 표제어 전체보기
[네이버 지식백과] 일본 고대사를 푸는 열쇠, 한반도 - 수수께끼의 초중기 고분 시대(4세기 ~ 7세기) (일본사 다이제스트 100, 2011. 12. 30., 가람기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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